미국, 한일수교때 한국에 ‘독도포기’압력
미국이 지난 65년 우리 정부에 한일수교(한일국교 정상화)를 강요하는 과정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 측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여 독도를 한국과 일본이 공동 관리하라며 사실상 독도를 포기하라는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미국은 ‘어업수역’에 관한 한일 협상에서 한국 측의 ‘평화선’등을 포기하고 일본 측의 12마일 선 주장을 수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독도를 폭파해 없애버리고 싶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한일협정은 어떻게 진행 되었을까?
미국, 한일 양국에 조기수교할 것을 압박
5∙16군사 쿠데타 뒤 들어선 군사정부는 한일회담의 성사를 서둘렀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씨는 ‘제2의 이완용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일 회담을 성사시키겠다고 기염을 토하며 1962년 11월 12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종필과 일본 오히라 외상과의 비밀교섭에서 ‘독립축하금’(대일청구권자금)의 형식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재정차관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낙착되었다.
이 과정에 미국이 상당부분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3년 한일 수교협상 초기부터 진행과정을 파악하면서 주로 일본 측 입장을 지지하며 한일 양국에 조기에 수교할 것을 압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지난 63년 8월 9일 주한 미대사관에 보낸 훈령에서 “국무부는 대사관이 한국 정부의 고위 인물, ‘아마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본인’에게 문제 해결을 위해 (어업협상에서 일본이 제안한 배타적어업수역 경계선으로) 12마일 선을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 시의적절하다고 믿는다”고 지시했다. 한국은 당시 이승만 정부가 고수했던 주관적 관할권(60마일의 평화선)을 철폐하는 대신 배타적 어업수역을 40마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 훈령은 “한국인들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대사관은 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이승만 라인(평화선)의 불법성에 대한 입장을 공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임을 알리도록 허락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1963년 12월4일자 전문에선 “박정희가 한일 관계를 건설적 기반위에 올려놓은 지도자로 한국사에 이름을 구축할 유일한 기회를 맞았다는 개념을 조장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미국이 개입하고 있다는 어떤 징후도 역효과를 낼 수 있다”면서 미국의 압력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라고 주한, 주일 미 대사관에 지시했다.
미 국무부가1964년 8월2일 서울과 도쿄의 미 대사관에 보낸 전문에는 당시 존슨 대통령이 W.G. 브라운 주한 미 대사를 통해 박 대통령에게 전달한 구두 메시지도 있다. 당시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이 일본과 정상적 관계의 구축을 추진할 것을 희망한다”며 “한일 정상화가 성취되지 않을 경우 아시아 자유세계의 입장이 악화할 것을 우려한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3억달러와 바꾼 민족의 자존심
미국의 개입이 베일 속에 가려진 채 우리 국민은 협상 결과 자체만으로도 분개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40년 넘게 우리 민족을 착취한 데 대한 배상액이 고작 3억 달러라는 것은 제쳐놓더라도, 식민 통치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얻지 못하였다.
우리 국민은 돈 몇 푼에 민족의 자존심마저 팔아 버리려는 박정희 정권으로 인해 심한 민족적 굴욕감을 맛보아야 했다. 이로 인해 여론의 반대가 거세게 일어났다. 말하자면, 일제강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굴욕적인 한∙일 회담에 대하여 학생과 국민은 거세게 반대하였다. 이른바 ‘6∙3사태’로 불리는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 한 가운데 일본과 1965년 6월에 한일 기본 조약과 갖가지 부수협정에 조인한 뒤 8월 14일 여당 국회의원만 참석한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한일협정의 체결로 박정권은 외자를 들여오는 데서 숨통이 트이게 되었고, 일본은 박정권과 동반자라는 가면을 쓰고 8∙15해방 이후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박정희, “문제해결을 위해 독도를 폭파시키고 싶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보관 되어 있는 1천여 쪽의 한일 수교관련 외교문서에 미국의 독도 포기 압박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한일 수교를 한달 앞둔 65년 5월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이뤄졌다고 한다.
이 비망록에는 ‘12년 간격을 두고 비밀등급을 강등할 것, 자동 기밀해제 안됨’이라는 직인이 찍혀 있다. 비망록에는 딘 러스크 당시 미 국무장관이 박 대통령에게 “독도에 한일이 공동 관리하는 등대를 세우고 그 섬이 어디에 속하느냐를 결정하지 말고 남겨둬서 자연히 (문제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공동 등대는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러스크 장관에게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다…. 문제 해결을 위해 그 섬을 폭파,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고 이 기록은 전하고 있다. 박대통령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이도성著)'에 따르면, 당시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일본 외상과의 이른바 `김-오히라' 회담에서 독도문제 해결을 제3국에 의한 조정에 맡기자고 제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독도에 대한 중재안 제시가 김종필의 제3국 조정 제안에 따른 것인지 또는 일본 측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그 전까지 미 외교문서에 나타난 양측의 독도문제에 대한 태도는 일본이 정치 적 타결을 기대하고 있었던 반면 한국은 독도 영유권 문제가 정치적 협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 1963년 2월1일 주일 미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한 전문은 일본 자민당의 독도문제에 대한 입장이 "독도문제가 대한(對韓) 관계정상화의 일부로 해결되지 않으면 미래에 불화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라는 것이었다.
또 1965년 5월5일 주일 미 대사관이 국무장관에 보낸 전문은 일본 외무성의 구로다 미즈오 동북아국장이 미 대사관 관계자에게 독도문제에 대해 "이것은 전혀 논의되지 않았고 마지막 협상에서 정치적인 수준에서 해결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측은 박정희가 1965년 4월13일 남해안을 돌아보던 중 배 위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독도문제의 정치적인 해결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독도는 국토의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문제의 미 외교문서에 기록돼 있다.
독도가 위험하다-일본의 독도 침탈 시나리오
지난 5월 5일 일본의 극우단체인 니혼시도카이(日本士道會) 회원 4명은 소형선박을 타고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오키섬에 도착했다. 이들 회원은 5월 2일 "일본 고래의 민족정신에 따라...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명)에 상륙을 감행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들은 5월 6일 오키섬을 출항, 시마네현의 에토모항에 도착해 해산했다. 일단 상륙 시도로 그친 것이다.
니혼시도카이 측은 독도상륙 실패 후 "기회가 있으면 게릴라식으로 독도 상륙을 시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에는 이 단체 이외에도 수많은 우익 단체들이 존재 한다. 이들 이외에도 또다른 단체들의 독도 상륙이 줄을 이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을 넘어서 우익단체가 독도 상륙을 시도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98년 11월 자위대의 독도상륙훈련이 비밀리에 진행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일본 외교의 지침 역시 독도 탈환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이미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지난 1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다케시마를 탈환하라'라는 제목으로 일본이 한반도의 안보 유사시 실력행사를 통한 독도 점령 시나리오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전문가들이 제기한 독도 침탈 시나리오는 그동안 주로 인터넷을 통해 알려졌지만 일부 우익인사들의 과장된 주장으로 받아 들여져 왔다. 시나리오를 제기한 전문가 중 한 사람인 배진수 전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분쟁 발발 가능성을 분석한 결과 세계영토분쟁 58개소 중 분쟁의 심각성 지수면에서 16위, 동아시아의 잠재분쟁지역 14개소 중 5위라고 주장했다.
배 전 연구원은 "최근 우익단체의 독도 상륙시도에 앞서 유엔에서 동해 표기와 관련된 한-일간 분쟁 해결을 권고했다는 보도가 나왔다"면서 "유엔에서 독도 문제 중재에 나설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 전 연구원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1단계), 헌법개정 등 분쟁화 여건 조성(2단계), 독도문제 유엔총회 상정(3단계), 유엔 안보리 개입 유도(4단계), 국제사법재판소 이송(5단계), 재판 결과에 불복해 군사대결(6단계) 과정을 밟고 있다. 잘못하면 독도문제가 한∙일간의 군사대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억지주장 매번 참는 것 잘못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내 아내를 자꾸 내 아내다 반복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지난 1월 국제해양법재판소 박춘호 재판관이 "자기 아내를 두고, 만나는 사람마다 '저 여자가 내 아내'라고 강조하는 꼴"이라고 비유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지난 5월 6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내-외신 정례기자회견에서 "독도는 우리 영토라는 인식을 확실히 한 상태에서 모든 문제에 대처하겠다"면서 "일본의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더불어 일본 정부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데 대해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 장관의 말은 '독도는 우리가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므로 쟁점화는 오히려 손해'라는 기존 방침과 그대로 연결돼 있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덧나는 상처'라는 의미다.
노무현 대통령과 반장관의 말은 우리 정부의 독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향후 대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가늠하게 해주는 척도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한 네티즌은 “다른 사람 눈치 보느라 자신의 것도 자기 것이라고 말 못하는 어이없는 언행”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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