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편 고어필름 제1호 '도살자'
한국 장편 고어필름 제1호 '도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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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국내영화계 화제작 2탄 '폭력의 무자비성을 통해 그 본질 되물어'


고어(gore) : 1. (상처에서) 나온 피, 핏덩이, 엉긴 피, 응혈 2. 살인, 살해, 폭력(이상 daum)

지난 여름 7월12일~21일 동안 영화팬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 속에 열렸던 제11회 부천판타스틱 국제영화제(PIFan) <금지구역> 부문에 초대받은 데빌그루브픽처스 대표인 김진원 감독의 <도살자(2007년, 76분)>와 홍콩 허먼 여우 감독의 <팔선반점의 인육만두(1993년 96분>는 호러 비주류 장르인 고어무비의 미래와 과거의 만남이었다. 이미 고어 영화의 걸작 반열에 오른 아시아 고어필름의 대표작과 막 태동하기 시작한 장편급 한국고어의 신호탄이랄 수 있는 작품이 한국의 인기 높은 영화제에서 만난 것은 우연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고어필름, 잔혹한 표현 자체가 메시지?

▲ 호러영화팬들이 좋아하는 전설의 고어필름. 인육만두를 소재로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끔찍한 표현에서 영화표현의 인간적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고어 컬트 영화광들의 숭앙을 받는 허먼 여우 감독의 전설적 명작 <팔선반점의 인육만두>. 이 영화의 사지절단 미학은 고어 장르의 기본적인 충실함을 넘어선 아연한 충격 그 자체다. 특히 너무도 무심하게 자행된 대량 아동 살해 시퀀스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스토리는 이해하기 쉽다. 보통 사람의 감정체계를 벗어난 연쇄살인범의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잔혹한 살인극과 비참한 자살.

아무리 특이하고 괴팍한 것을 좋아하는 관객일지라도 이토록 살육과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의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안 생길 수는 없는 법. 아울러 이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숨겨진 의도가 새삼스레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런 의문은 곧바로 이번 제11회 부천 환타스틱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한국의 장편 고어 무비인 <도살자>에까지 이어진다.

무자비한 권력의 속절 없는 피해자들

김진원의 <도살자>는 스너프 무비를 찍는 일당의 손에 납치된 희생자들이 온갖 고문을 당하다 속절없이 죽는다는 섬뜩한 정도로 간단한 줄거리의 장편 고어필름이다.

이 영화는 장면마다 빨간 수류탄이 핏빛처럼 번쩍번쩍 터진다. POV (Point-of-View) 샷이 잡아내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장면들은 영화 속 피해자들과 더불어 관객까지 고문하는 효과를 낸다. 그런데 이 잔인무도한 스너프 무비를 찍는 영화 속 감독의 외모는 놀랄 정도로 평범하고 수더분하다. 본격적으로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는 엄마와 다정하게 전화통화를 나누어 엄마의 근심을 덜어드리는 효자 노릇까지 한다.

그러다 스너프 감독이란 직업에 매달리는 순간부터 이 사내는 가히 무소불위의 위력을 발휘하는 감독의 자리에서 폭력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목에 항시 매달고 있는 카메라는 그 권력의 상징물이다. 감독은 아내와 함께 잡혀온 남자에게 태무심하게 이야기한다.

“10분만 참으면 너와 네 아내를 무사히 돌려보내 주지.” 이 10분은 스너프 무비의 완성을 위해 바쳐지는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다. 망치로 머리를 때리고 전기톱으로 왼손가락을 우두둑 소리를 내며 잘라낸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남편은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면 감독은 예술가처럼 읊조린다. 감독의 모든 말이 명령이다! 감독이 목에 두른 카메라는 사람을 고문하는 이유이며 그 이유의 기록이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니 아내를 고문할 텐데. 고문의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널 살려주지”
“아내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낸 다음에 입에 물게 해요!” 만신창이가 되다시피한 남편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아내의 목숨을 판다.

가학적인 상황에서의 아이디어를 쥐어짜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남편의 절박한 곤경은 시간을 다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굴욕적인 핏빛 자화상이다.

피와 비명으로 뒤범벅된 이 작품은 생사여탈권을 쥔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는 희생자들의 그 어떤 희망도 자비도 기대할 수 없는 지옥여행이다. 무자비한 힘을 과시하는 폭력은 조금치도 인간적 품위를 고려하지 않는다. 짙은 한숨을 토하게 할 정도로 견딜 수 없을 만치 잔혹하다. 피해자들의 고통과 희생의 의미는 영화 그 어디에서도 찾을 데가 없다. 사람은 고통 자체보다는 고통의 무의미에 더욱 절망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 한국 최초의 장편 고어필름. 스너프 영화를 찍는 과정을 통해서 무자비한 폭력을 겪는 인간의 나약함을 아무런 동정심 없이 표현했다
이렇듯 고어 영화는 무자비한 권력과 그 희생자들이 빚어내는 핏빛 현실의 잔인한 측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가학적인 고문과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이 고어적 분위기의 바탕이다.

고어 감독들은 희망을 얘기하는 데에는 그닥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염세적일 만치 현실과 닮아보인다.

이런 뜻에서 메이드인코리아 고어 무비를 보게 됐다는 것 자체가 우리 영화가 진일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재의 외연은 확대되고 표현의 수위는 극렬과 잔인함의 극한까지 나아가고 있지만 관객들은 한결 차분해진 것이다.

잔인한 표현과 상상력을 원하는 관객들의 호응 속에서 앞으로 <도살자>를 기점으로 우리 나라에 <팔선반점의 인육만두> 같은 걸작이 탄생할 때까지 이 천대 받던 비주류 장르 고어 필름의 흐름이 끊이지 않고 계속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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