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의 전통적인 생각으로 다산 같은 학자도 전적으로 인정했던 주장의 하나는, 신분이 높을수록 귀(貴)하고 싶은 욕심이 있고 일반 서민들은 우선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귀해야만 명예도 높고 권력이 있어 떵떵거릴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높은 벼슬에 올라 귀한 신분이 되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귀하고 높은 사람은 당연히 임금이지만 임금이야 지존(至尊)이기 때문에 달리 언급할 필요가 없고, 정말로 귀하고 명예로운 신분의 하나가 바로 임금의 사위인 부마였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부마들은 글도 잘했고 똑똑했지만, 크게 권력의 횡포를 부린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예외적으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렇다는 뜻입니다.
정조대왕에게는 다른 아들, 딸도 있었으나 장성한 아들로는 순조대왕이 있었고, 외동딸 한 분이 있었으니 바로 숙선옹주(淑善翁主)였습니다. 숙선옹주의 남편이 곧 해거재(海居齋) 홍현주(洪顯周 : 1793-1865)였으니,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졌으나 흔히 해거도위(海居都尉)라고 불리었던 당대의 문장가였습니다. 다산보다 29세의 연하로 아들의 친구뻘인 셈이었습니다.
영의정 홍낙성의 손자이자 연천 홍석주(좌의정), 항해 홍길주(당대의 학자) 등의 아우로서 노론 대가의 후예였습니다. 그만한 명예와 권력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당도 다르고 학문경향에도 큰 차이가 있던 다산을 흠모해서 수시로 다산의 거주지인 마재를 자주 찾았던 분이 영명위였습니다.
다산이 70을 넘은 노인이던 때, 홍현주는 자주 다산을 찾아뵙고 학문을 물으며 시주를 즐기면서 참으로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부, 권력, 명예 등 어느 것에도 부족함이 없고 문장까지 뛰어난 그가 노후의 다산을 찾아가 위로하고 함께 즐겼던 것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권력이동의 계절에 지위가 높고 권력이 손에 쥐어졌다고 날뛰려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높을수록 힘없고 애잔하지만 가치 있는 분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만한 신분, 명예, 권력에도 끝까지 다산을 돌봐주었던 정조의 사위 연명위의 높은 인격을 그리는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본받고 싶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