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인 수녀가 암 투병의 고통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겨내고 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는 시집 ‘엄마’를 펴낸 것.
‘위로’를 보내는 따뜻한 감성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이해인 수녀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카톨릭 세례를 받았다.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부산 성 베네딕도회 수녀로 봉직중이다.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Olivetan Benedictine Sisters)소속으로 1968년에 첫 서원을, 1976년에 종신서원을 했다. 올해로 수도생활 40년을 맡았다.
그는 ‘수녀’인 동시에 ‘시인’이기도 하다. 1970년 ‘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펴낸 이래 8권의 시집, 7권의 수필집, 7권의 번역집을 펴냈다. 지난 25년 동안 한 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이해인 수녀가 11회, 법정 스님이 9회를 기록할 정도로 그의 책은 모두가 스테디셀러로 종파를 초월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초·중·고 교과서에도 여러 시들이 수록돼 있다.
여성동아대상, 새싹문학상, 부산여성문학상, 올림예술대상 가곡작시상, 천상병 시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박한 언어로 ‘순수와 맑음’ 노래하는 시인 이해인 수녀
30년 시인생활 꾸준한 대중적인 인기, 세간의 관심 곤혹
그러나 그는 세간의 관심에 오히려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실제 1980년대 당시 무명이었던 그가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로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평단의 도마에 오르내려야 했다. 그의 시는 신을 향한 간절한 기원이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연시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혹여나 고요하고 낮은 곳에 임해야 할 수도자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을까 많은 걱정을 해야 했다.
“(유명해진 데 대한) 책임을 지려니 고달프지요. 저에게 이메일이나 편지를 보내서 수도자가 언론에 이름과 얼굴이 나면 안된다고 야단치시는 분들도 있어요. 예전엔 그런 말을 들으면 속상했어요. 마음도 많이 흔들리고요. 요즘은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답장을 써요.”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에 힘을 얻어 지금도 펜을 놓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과도한 관심은 그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속상함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그는 ‘꽃의 연가’라는 시에 이 답답한 심정을 담아냈다. ‘너무 쉽게 나를/ 곱다고만 말하지 말아주세요/ 한번의 피어남을 위해/ 이토록 안팎으로/ 몸살 앓는 나를’이라고.
친근하고 소박한 언어
수도생활을 하면서 바닷가 수녀원의 ‘해인글방’에서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가 담긴 글과 시를 쓰고 있는 이해인 수녀. 그는 1980년대 시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을 정도로 수도자임에도 30년의 시인생활 동안 꾸준히 대중적인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시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산문집 ‘기쁨이 열리는 창’ 팬 사인회를 기억한다.
“사람들이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사람들이 거짓말같이 많이 와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 했다. 흔히 내 시는 10대의 꿈꾸는 소녀팬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내게 오는 편지들을 보면 나이 지긋한 남자, 장애인, 주부 등 폭이 넓다. 종교를 달리해 비구니들도 있다. 아마 누구에게나 다 있었던, 하지만 살면서 사라져버린 순수한 마음과 맑음을 되찾고 싶은 마음, 선(善)과 미(美)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것 같다.”

내놓은 책마다 관심을 받은 이해인 수녀지만 이번에 선보이는 ‘엄마’는 좀 더 각별하다. 지난 9월 작고한 어머니의 1주년을 기념한 열 번째 시집의 원고를 탈고하자마자 뜻밖의 암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수술을 받고 잠깐 동안의 회복 기간을 거쳐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한 그는 이 힘겨움을 견뎌낼 힘으로 ‘어머니’를 부른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해인 수녀의 어머니에 대한 정은 각별하다. 강원도출신인 어머니는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그의 지켜주는 든든한 뒤꼍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전쟁 중 그의 아버지가 납치를 당하며 그와 어머니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다.
“수도자들이 인간적인 슬픔에 연연하면 안 되지만 어머니가 많이 그립습니다. 95세에 돌아가셨는데 오래 사셔서 함께한 시간이 기니 더 그리운 것 같아요. 어머니는 산처럼 과묵하고 강인한 분이셨어요.”
암 선고를 받았을 때도 이해인 수녀는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아픈 걸 다행으로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고통을 견뎌내며 그는 “엄마를 부르면 일단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7월19일 암 수술 후 병실에서 출간을 앞두고 독자들에게 쓴 친필 편지에서도 그는 ‘생전 처음으로 큰 수술을 받으면서 수없이 하느님과 엄마를 불렀습니다. 엄마가 이미 가 계신 저 세상에 가도 좋고 좀 더 지상에 남아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일을 하고 가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하도 보고 싶어 실컷 울고 나면 후련할 것 같다가도 다시 다시 맑고 깊게, 높고 넓게 그리워지는 어머니…. 유난히 꽃을 사랑하시어 편지 안에도 매번 꽃잎을 넣어 보내시던 어머니께 꽃물 든 그리움으로 이 자그만 사모곡을 바칩니다’라고 말하는 등 ‘엄마’는 어머니를 향한 이해인 수녀의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사랑을 담고 있다.

이해인 수녀는 시를 통해 “무작정, 언제라도 부르면 좋은 엄마, 힘이 되는 엄마, 부르는 것 자체로 기도가 되는 엄마, 이제는 세상에 없지만 내 마음속에서 매일 새롭게 살아나는 엄마. 나의 눈물, 나의 기쁨, 나의 그리움”인 엄마를 추억한다.
시 곳곳에서 ‘귀염둥이 작은딸’로서의 친근한 해인 수녀 모습도 만날 수 있다. ‘화려한 선녀’의 꿈이 태몽이었던 둘째 딸, 한껏 멋을 낸 엄마에게 좀 수수하게 차려입으라며 잔소리를 하는 딸, 엄마가 즐겨 해주시던 카레라이스와 오므라이스를 좋아하는 딸, 엄마가 실수로 화장실 변기에 반지를 빠뜨리자 맨손을 넣어 반지를 꺼내기도 하고 어머니 회갑 때는 여덟 장의 편지를 써 어머니를 감동케 한 효녀. 이처럼 어머니 앞에서는 수도자인 그도 때론 철없고 때론 기특한 딸이었다.
이 책은 한 사람을 향한 책이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어머니를 향한 이해인 수녀 자신의 사모곡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를 품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자식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모든 이를 보듬기 위해”
이해인 수녀는 현재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치료에 몰두하고 있다. 수술 후 회복 기간을 거쳐 긴 항암치료에 들어간 것.
보호자인 원장 수녀가 치료에만 전념하라는 엄명을 내려 전화기도 없고, 메일도 못 쓰고 이젠 오로지 치료에만 전념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답답한 생활에 CD플레이어도 사서 시 낭송도 듣고 음악도 듣고는 한다.
이해인 수녀 암 투병 중 절절한 그리움으로 부르는 ‘엄마’
“투병의 고통, 모든 이들을 끌어안고 보듬을 수 있는 계기”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이 세상과의 단절을 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해인 수녀는 “날 돌볼 겨를 없이 바삐 살아왔으니 이젠 내 안으로 들어가서 사막의 체험을 해야겠어요. 재충전의 시간도 가질 수 있으니 선물이고 또 기도의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올해로 수도 생활 40년을 맞았고, 60대 초반이니 그동안 썼던 글과 했던 말들을 정리해보며 돌아보는 계기도 될 것 같고요”라고 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기도에서 새 힘을 얻어 열심히 ‘투병의 길’에 들어설게요. 대수술까진 무사히 마쳤는데 앞으로 항암치료 등 더 험난한 길이 남아 저를 두렵게도 하지만 최선을 다하도록 용기를 내야지요. ‘엄마’의 주인공처럼 저도 단순하고 지혜로운 원더우먼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라고 ‘희망’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