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결국 사퇴하고 사의를 표명했던 정홍원 국무총리가 유임되는, 사상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박근혜정부의 인재풀이 사실상 바닥을 드러낸 것으로, 이에 따른 향후 정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6일 박근혜 대통령은 정홍원 국무총리의 사의를 반려하고 유임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정홍원 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지 60일 만에 내린 결정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국무총리가 사의 표명을 했지만 유임 조치된 사례는 처음 일어난 경우라서, 향후 정계에 만만치 않은 후폭풍이 불 전망이다.
◆정홍원 총리 사의 ‘없었던 일’?
이날 오전 윤두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지금 시급히 추진해야 할 국정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청문회 과정에서 노출된 여러 문제들로 인해 국정공백과 국론 분열이 매우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윤 홍보수석은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만은 없어 고심 끝에 오늘 정홍원 국무총리의 사의를 반려하고 국무총리로서 사명감을 갖고 계속 헌신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앞서 정홍원 국무총리는 세월호 참사 발생 11일 만인 지난 4월 27일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의 표명했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를 수습한 이후에 사표를 수리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국무총리 후보로 오른 안대희 전 대법관과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돌출되며 연달아 후보직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정 총리의 사퇴는 결국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은 이유와 사연이 어찌 됐든 겉모양새로 보면 ‘다른 국무총리 후보감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그냥 정 총리를 주저앉힌 것 아니냐’는 선입견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이에 대해 한 정치평론가는 “정홍원 총리 역시 애초에 사의를 표명했던 때와는 달리 박 대통령의 유임 결정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물론 총체적인 정국 상황을 보면 정 총리가 사임 의사를 끝까지 고수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른바 ‘면’은 상당히 서지 않게 됐다”고 분석했다.
한편 정홍원 총리는 유임이 결정된 직후 정부서울청사에서 간부회의를 주재하면서 본인의 입장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정홍원 총리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후 국가 개조를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국가적 과제에 직면해 있지만 후임 총리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 과정이 길어지고 국론 분열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정 총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대통령께서 제게 다시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셨다”며 “저는 고사의 뜻을 밝혔지만 ‘이런 중요한 시기에 국정이 장기간 중단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대통령님의 간곡한 당부가 계셔서 새로운 각오 아래 임하기로 했다”고 심정을 밝혔다.
◆격렬한 반응 보이는 야권
아울러 정홍원 총리는 “앞으로 국가를 바로 세우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과 공직사회 개혁, 부패 척결, 그리고 비정상의 정상화 등 국가개조에 앞장서서 저의 마지막 모든 힘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 총리는 “필요한 경우 대통령께 진언을 드리면서, 국가적 과제를 완수해 나가겠다”며 “이제 제가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편한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도와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렇게 정홍원 총리의 유임이 결정됨에 따라, 정국은 안대희-문창극 전 총리 후보가 사퇴 의사를 밝혔을 때보다도 더욱 큰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어 보인다. 일단 야권에서의 격렬한 반발이 빗발치고 있다.
26일 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홍원 국무총리를 유임한 것과 관련해 “국민 눈높이에 맞는 새로운 총리 후보 한 명을 추천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정권임을 자인한 것”이라고 힐난했다. 유기홍 수석대변인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현안 브리핑을 열고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 근본적으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국민 의지에 부응할 생각이 있는 것인지 의심을 갖게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유 수석대변인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문책을 면한 것과 관련해선 “인사시스템의 문제를 인정해 청와대에 인사수석실을 둔다고까지 하면서 끝내 김 실장의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아울러 새정치연합 당 지도부도 박근혜 대통령이 내린 정홍원 국무총리 유임 결정을 격하게 비판했다. 박영선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펑크 난 타이어로 과연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겠느냐”며 “한 마디로 어이가 없다”고 맹비난했다.
이어 박영선 원내대표는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진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대통령의 말씀은 거짓이었나. 대통령이 보인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었나”라고 반문했다. 이와 동시에 박 원내대표는 “무능·무기력·무책임한 3무 정권”이라고 강도 높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김영록 새정치연합 원내수석부대표는 같은 날 열린 정책회의에서 “새누리당 원내대표단이 번갈아가며 인사청문회 도덕성 검증을 비공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새누리당은 안대희·문창극의 낙마가 왜곡보도와 낙인찍기라고 탓하면서 인사청문회 법을 손보겠다고 청와대에서 다짐하고 왔다”고 말했다.
이어 김 원내수석부대표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끌어내린 것은 바로 청와대”라며 “뜯어고쳐야 할 것은 국민·언론·인사청문회도 아닌 바로 인사 참극을 야기한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이라고 성토했다.
설훈 새정치연합 의원 역시 “인사청문 제도는 인사 검증을 위한 당연한 장치인데 박근혜 대통령이 인사청문회가 두려워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켰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박 대통령 본인의 입맛대로 법을 고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지원 의원은 같은 날 자신의 트위터에 “지난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물러갈 정홍원 총리에게 질문하지 말라’는 유인태 의원의 조크에 나는 ‘정홍원 총리는 관운이 좋아 3년 반 총리 더 할거야’라고 했다”며 “어제 연합TV 뉴스와이에 출연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만 말이 씨가 되었다”고 냉소적으로 적었다.

◆“하반기 총리 인선 다시 할 수도” 전망
정의당 천호선 대표도 박근혜 대통령의 정홍원 총리 유임 결정에 대해 “기가 막힌 인사다. 개혁 포기 선언이며 국정 운영 능력의 상실을 고백하는 것”이라며 “문자 그대로 레임덕이 시작됐다. 그 누구도 아닌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한편 여당인 새누리당은 야권과 달리, 비교적 차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완구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전날 박근혜 대통령과 가진 회담에서 정 총리 유임을 논의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한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답변했다.
이어 이완구 원내대표는 “정홍원 총리의 유임을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다”며 “다만 국정이 이렇게 장기간 공백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깊은 고뇌를 집권당 원내대표로서 한 것은 사실”이라고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또한 지난 새누리당 유력 당권주자로 꼽히는 김무성 의원은 정홍원 국무총리 유임 결정에 대해 “대통령의 고뇌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 의원은 이날 같은 당 김상민 의원의 출판기념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그릇된 청문회 문화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같이 말했다.
이어 김무성 의원은 “이 모든 것이 대통령의 고뇌에서 나온 문제라고 생각하고 충분히 이해하는 입장”이라고 적극 옹호했다. “정홍원 총리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었는데 그럼 이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이냐는 야당의 지적이 있었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김 의원은 “이 모든 것까지 감안한 결정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김무성 의원과 함께 당권 경쟁을 치열하게 펼치고 있는 서청원 의원은 같은 날 정홍원 총리 유임 결정에 대해 “물론 아쉬움도 있고 안타까움도 있지만 국정 책임자의 국정 공백의 장기화에 대한 부담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고 비판과 옹호를 섞은 듯한 뉘앙스의 소감을 밝혔다.
이어 서청원 의원은 “과연 국민의 요구에 부응했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만 인사권자의 고뇌도 고려해야 할 상황”이라며 “대안을 가져오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합당한 인물을 찾고 설득하는 작업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정홍원 총리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많은 교훈을 얻었을 것이기에 앞으로 이러한 경험이 총리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처럼 헌정 사상 처음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국민은 물론 여·야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에 대해 한 정치평론가는 “두 명의 국무총리 후보가 결국 사퇴하고 이로 인한 국정운영의 치명적인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청와대의 고육책으로 풀이된다”고 분석했다.
이 평론가는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개조’를 강조했던 청와대라든지, ‘정국 혼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취지를 설파했던 정홍원 총리 모두 이번 유임으로 체면과 신뢰에 상당 부분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비판했다.
이 평론가는 “나가서는 최악의 경우 ‘박근혜 정부가 그렇게도 인재풀이 없단 말인가’라는 국민의 불신까지 초래할 수도 있다”며 “이 때문에 지금은 정 총리의 유임을 통해 일단 정국을 안정시킨 다음, 인사청문회 및 새누리당 전당대회·7·30재·보선이 모두 끝난 올해 하반기 무렵부터 도덕성과 능력을 함께 갖춘 국무총리 후보를 본격적으로 물색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