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미스틱 리버
[영화리뷰] 미스틱 리버
  • 이문원
  • 승인 2003.11.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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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지난 '고집'이 성공으로 이끈 이례
'배우 출신 감독'에게 고유의 스타일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다루는 소재와 구성된 스탭의 개성에 따라 매번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내놓는 '고용감독'의 위치에 만족하는 듯 보이며, 배우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통제하기 위해 연출을 맡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3년 간 24편의 상업용 극영화를 연출해오며 고정된 몇 가지 특성들을 꾸준히 화면 안에 새겨놓는 작업을 통해 '배우 출신 감독'들 중 가장 먼저 '작가'의 칭호를 부여받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입지는 상당히 예외적인 것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는데, 그 특성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개인적 스타일이라 판단되기엔 무리가 있는 '버릇'들, 그것도 '나쁜 버릇'들이 지속적으로 고수되어 온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버릇'들이란, 구조적으로는 느릿느릿한 진행, 단락별로 끊겨지는 리듬, '한 상황에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정보 하나'라는 식의 딱딱하고 단편적인 시퀀스 구성, 거의 순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순차적 전개 등이며, 주제상으로는 세대차를 극복한 인간교류, 죄의식, 지친 남성상 따위의 별달리 흥미로울 것 없는 아이템의 반복, 그리고 테크닉상으로는 과도하게 어두침침한 조명사용 등을 들 수 있고, 전체적으로 남다른 비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더 이상 선택하지 않는' 도구들을 집요하게 고수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영화에 똑같은 비쥬얼 스타일을 입히는 브라이언 드 팔머와 흡사한, 결국 '영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거나 기다리기보다는 일단 자신의 고정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놓고 성패여부를 지켜보는 식의 고집스런 원패턴 작가에 속한다. 이런 고정된 특성들이 발휘된 이스트우드의 영화들 중에는 우연찮게 적절한 소재를 만나 성공한 케이스도 있었고, 처참하게 실패한 케이스도 있었으며, 그럭저럭 평작의 수준을 유지한 케이스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신작 "미스틱 리버"는 다행스럽게도 위에 언급한 그의 고정된 특성들이 우연찮게 잘 맞아떨어져 좋은 효과를 낳게 된 성공작일 뿐 아니라, 그의 대표작으로까지 평가될 수 있을 법한 '이스트우드 스타일을 위한 영화'로 탄생됐다. 이제 '이스트우드 스타일'이 "미스틱 리버" 내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며 예기치 못한 상승효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미스틱 리버"는 이스트우드가 즐기는 '순차적 구성논리'에 따라 세 주인공인 지미, 숀, 데이비드의 어린 시절 사건부터 시작된다. 대개의 경우, 현재 시점 내에서 컷백으로 처리될 수 있을 법한 이 시퀀스는 액면 그대로 영화의 첫머리에 당당하게 등장해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먼저 들어앉게 되는데, 이를 통해 초반 사건의 중심인 데이비드(팀 로빈스 분)가 영화의 주제를 집중시키는 캐릭터로 설정되리라는 암시를 미리 '통보'해주고, 이어지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에서 지미(숀 펜 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더라도 관객들의 뇌리에 먼저 자리잡은 데이비드의 캐릭터가 지미의 이야기와 뒤얽혀 귀납적 결론에 정확하게 도달하도록 돕는 효과를 거둬냈다. 미리 계산된 것인지 우연히 벌어진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중캐릭터 무비에서 가장 성취하기 힘든 부분을 "미스틱 리버"는 가장 '무식한'(?) 방법을 통해 간단하게 해결해내고 있는 것이다. "미스틱 리버"에는 또한 이스트우드 특유의 기계적 인물배치가 최상의 효과로 드러나고 있다. 지미의 딸이 살해당하는 시점부터 다시 모이기 시작한 세 주인공은, 정확히 말하자면 세 명의 인물이 아니다. 두 명의 대립되는 캐릭터와 이 대립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구조이며, 결국 이 '시선'의 역할을 맡은 숀(케빈 베이컨 분)은 영화 내에서 사건의 '과정'을 알려주는 기계적인 역할 - 직업조차도 이에 딱 맞는 '형사'이다 - 과 종결부에서 주제를 압축해주는 전지적 기능에 그쳐버렸지만, 이스트우드 드라마 투르기의 딱딱함과 무모할 정도의 분절성에 이미 압도되어 버린 관객들에게, 이런 기능적 캐릭터의 등장은 관람의 큰 장애로서 작용하지 않게 되며, 오히려 육중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함축지점을 명확히 알려줘 다소 버거운 영화의 정서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시종일관 영화를 이끌어가는 무거운 발걸음, "L.A. 컨피덴셜"과 "페이백"을 각색했던 브라이언 헤젤런드의 날렵하고 세밀한 각본을 일정부분 '무너뜨린' 것으로 여겨지는 이 무거운 진행의 과정 속에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나 자극적이고 논란적인 사상을 발견할 수는 없으며, 인물들 자체도 그닥 깊이있게 탐구되거나 세심하게 구성된 인물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평범한 불행을 겪은 평범한 특이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 표정 등이 불필요할 정도로 반복되고, 집요할 정도로 추고에 추고가 더해지는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비로소 이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긴 호흡구조 내에서 그 성격화의 원형을 헤아려보게 되며, 결국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스트우드 영화치곤 다소 과격한 결말을 선보이고 있지만, 이 '고통스런 과정'을 겪고 난 관객들이라면 영화의 종결부에서 돌발성을 느끼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관객들을 꾸준히, 끈덕지게 한 방향으로 몰아넣어 마침내 영화의 긴 호흡구조와 관객 나름의 호흡을 일치시키는 작업에 확실히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성공의 배경에는 톰 스턴의 묵묵하고 관조적인 촬영과 자신의 개성과 장기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숀 펜, 냉혹한 여피 이미지에서 탈출해 새로운 인물상을 선보인 팀 로빈스 등 출연진 전체의 호연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변치않는 '고집'이며, 그의 '작가로서의 존재감'이 시종일관 스크린 안에 비춰져 관객들을 힘있게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미스틱 리버"는 유별난 영화이지만 동시에 뛰어난 영화이기도 하다. 독창적인 발상도 미래를 견지하는 선구성도 기본적인 영화제작의 재기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압도적인 감흥을 관객에게 안겨주며, 나름의 독보적인 영역을 스스로 찾아내고 있다. 이스트우드가 고집하고 있는 자신의 '스타일'이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건, 그저 버릇이나 괴벽에 그치는 것이건 간에, 그 스타일 내에서도 훌륭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음을, 철지난 단점들로 뭉쳐진 이스트우드 스타일의 집합체 "미스틱 리버"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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