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출발점
혁신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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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일병 사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군대 간 아들이 후임병들에게 못된 짓을 하다가 발각됐다는 소식을 듣고 받은 충격은 흔히 말하는 유명 인사의 추문을 보고 들을 때 분비되는 흥미감에서 유발됐던 것 같지는 않다. 아직도 진행 중인 윤 일병 집단 폭행 사망 사건이나 김해 여고생 암매장 살인을 접하는 순간 마음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뭔가가 울컥 치받아 오르는 그런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세월호 이후 대한민국이 대체 달라진 게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사람마다 대답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적어도 확실히 달라진 것 하나는 있는 것 같다. 마음이 둔감해진 건지 담담해진 건지 도통의 경지에 이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경악스런 사건 보도를 접해도 이제는 어지간하면 그냥 별 감정의 동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 도지사의 사건은 좀 달랐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야 어렴풋이나마 그 수수께끼를 푼 것 같다.

남 도지사 같은 유명 인사는 그답게 자식 교육도 꽤나 잘 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사실 근거 없는 믿음의 한 귀퉁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지난 6월 서울시장 선거운동 기간에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자의 아들이 ‘미개하다’는 발언을 했다고 해서 당시 비록 선거판이었다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좀 가학적이다 싶을 만치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적이 있다. 그 발언 내용은 꽤 한쪽으로 치우쳐 구멍난 치즈처럼 놓친 것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런 말을 발설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젊은이 특유의 오만이나 자신감으로 봐도 될 성싶었다. 그러나 남 도지사 아들 사건은 젊으니까 군대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며 스스로 강변하다시피 해서 좋게 넘어가자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근래 새삼스럽게 ‘가정교육’이란 말이 문득문득 생각날 때가 많아졌다. 격변하고 요동치는 세계에 대한 체감도가 높아갈수록 좋게 달라진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아마도 인지상정일 것이며 그러다보면 우리나라가, 아니 이라크 내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이스라엘-가자 분쟁, 유럽의 극우의 부상과 분열, 중국과 주변국들의 영토 마찰, 일본의 군사대국화, 아프리카의 비참한 현실 등의 재료가 버무려져 역사를 축적하고 있는 세계가 어쩌다 이렇게 무섭게 변해도 되었나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에게 가끔은 미안한 느낌이 든다.

인간의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다부지게 달려들 때는 우선은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따지고 보면 결국은 모든 문제와 결실들이 사람 자신으로부터 나와 사람 자신에게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든다. 선악 모두 인간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 혁신이란 좋고 아름다운 말이긴 하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저질 납으로 땜질하듯이 제도를 뜯어고치고 이러저러한 조직들을 요리조리 위치전환만 한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뿌리깊이 박힌 악습과 부정부패들이 혁파된다고 믿는다면 이는 큰 오산이 아닌가 싶다. 문제는 늘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촌이 안고 있는 숱한 문제들의 원인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혁신의 대상은 물적 제도나 체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은 나는 순간부터 양질의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아야 한다. 자녀들을 학교나 학원, 혹은 외국에 유학 보내고 나서 내 할 도리 다했다고 뒷짐 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량적 교육은 눈에 보이는 교육제도와 인프라의 외양을 바꿈으로써 한시적으로 가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질적으로 혁신된 교육은 무엇보다 가정에서 비롯한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가정교육 자체가 갑자기 사라지는 가정이 꽤 많다. 그러나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자녀들은 학교에서 좋아질 가능성보다는 나빠질 가능성이 더 크다.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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