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가 노태우 다루던 방식으로 한 번 덤벼봐...
이해찬 총리의 후임에 한명숙 의원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자 남다르게 기뻐하고 환영한 인물이 있다. 바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다. 총리 인선에 있어서 자신의 의사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단순히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며, 여성 총리가 탄생하게 된 것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총리를 끌어내리고, 새 총리를 인선하게 된 것이 노 대통령의 의중이 아닌, 철저하게 계획된 정 의장의 의중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정 의장이 여권에 새로운 실세로 등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방선거와 차기 대선을 위해 정 의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당내에서나 청와대와의 관계에서 이 전 총리라는 장애물에 막혀 목소리가 그다지 크지 못했던 정 의장으로서는 이 총리의 사임이 여간 반가운 일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청와대와 여당 사이에서 적절한 완충작용을 하며, 청와대를 든든히 보완하던 이 전 총리가 사라지자 청와대는 직접적으로 여당의 압박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따라서 한명숙 의원이 총리가 된다면 이 전 총리 시대와는 달리 정동영 의장이 여권의 2인자로 부상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만큼 당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정 의장은 말 그대로 물을 만난 상황이다.
◈또 한 번의 정치게임은 시작되고
물론, 정 의장의 이 같은 행보에 직접적으로 우려를 표하는 시각도 있다. 바로 당내 김근태계 의원들이다. 김근태계의 한 의원은 “정 의장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한명숙 의원이 총리로 지명 됐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우려가 된다”고 하며 씁쓸함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그는 “총리가 당과 너무 밀접해서는 안 되고, 청와대에서 발탁한 인물로 보여야 하는데, 너무 당에서 파견한 사람이 지명됐다는 식으로 나가면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 의장은 지난 14일 청와대 면담에서 노 대통령의 이 전 총리에 대한 유임 의중에도 불구하고 이 전 총리의 사퇴를 주도 했던 것은 물론, 21일 여수에서는 여성 총리를 건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과 정 의장 간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팽팽한 분위기다. 이 전 총리 사임 문제와 관련해 이번을 기회로 활용해야 무엇을 하더라도 한다는 정 의장의 속내가 노심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노 대통령에게 적은 야당이 아닌 여당 수뇌부에 있었던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가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는 총리 인선과정이 사전에 새어 나간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고 말하며, 당과 청의 불협화음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은 것 또한 노 대통령의 심정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 사이의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정 의장이 청와대보다는 그 기류를 주도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분위기다. 1라운드의 승자는 누가 보더라도 이 전 총리를 끌어내린 정 의장의 승리가 확실하다. 그러나 정치 10단인 노 대통령이 그렇게 쉽게 지고 있을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라 하였으니,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다시 한 번 고도의 정치게임을 시작한 것이라고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한명숙 의원이 되었든, 김병준 정책실장이 되었든 정 의장의 의견을 못 이기는 척 따라줌으로써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과 청이 같은 편인 듯하면서도, 또 적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대통령도 당 의장도 정치 생명을 위해서는 고도의 정치게임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방선거와 차기 대권을 위한 치열한 살육의 전쟁은 이미 시작 되었다.
◈정치 10단을 이기려 하다니
결과적으로 본다면 노 대통령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현재 지방선거에서 완패가 예상되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정 의장은 어떻게든 총력을 기울여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어야만 한다. 만일 현재의 분위기대로 열린우리당이 선거에 패배했을 경우 그는 꿈꾸던 대권은 물론, 당 의장 자리마저 책임을 지고 내 놓아야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목소리를 키워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노 대통령은 여유로운 편이다. 남은 임기 동안 큰 탈 없이 국정 운영 전반에 투자를 한다면, 순풍을 탄 돛단배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가는 길목에 지방선거는 하나의 암초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암초마저 정 의장이 나서서 제거를 해 주려는 모양이니 노 대통령으로서는 내심 고마운 일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 전 총리를 유임시켜 지방선거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그 책임론은 마땅히 노 대통령에게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 의장과 당이 나서서 새 인물을 내세워주었으니 노 대통령으로서는 감사한 일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토록 신임하던 이 전 총리를 잃게 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고 섭섭한 일이지 않을 수 없으나, 멀리 내다본다면 실이 득이 되는 형상이다.
먼저 이기고 결과적으로 지는 게임이 될 것인지, 먼저 지고 결과적으로 이기는 게임이 될 것인지의 선택에서 노 대통령은 후자를 선택하고 정 의장은 전자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누구도 장담을 할 수는 없다. 지방선거의 결과를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현재까지의 흐름으로 보아서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 의장의 힘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편해지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노 대통령이다. 고심하는 듯하지만, 가만히 앉아 지켜보며 결과만 챙기면 그만이다. 지방선거에서 정의장의 분투로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면 파이를 나눠먹으면 되는 것이고, 만일 패하게 된다면 그 책임을 전가시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얽히고 얽힌 상황들 때문에라도 한명숙 의원은 결코 당적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한 의원이 야당의 뜻에 따라 당적을 포기하게 될 경우 누구에게도 도움 될 것이 없다”고 하며, “정 의장은 정 의장대로, 노 대통령은 노 대통령대로 한 의원의 당적이 반드시 필요한 입장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한 의원의 총리 내정이 어느 정도 여권의 지방선거에 대비한 하나의 방안도 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 때를 잡아야 한다
어떻게든 해보려 하는 정 의장의 노력이 가상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2004년 17대 총선 직전인 3월 말 “60대 이상의 노인은 투표를 안 해도 괜찮다”는 노인폄하 발언을 해 정치 생명에 치명적인 오류를 남겼던 정 의장. 그가 최근에는 대한노인회를 찾아 효도하는 지방정부를 만들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을 하며, 그동안 멀어졌던 老심 잡기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盧심을 뒤로 하고, 老심을 먼저 잡아야만 살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지난 24일 정 의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조선시대 전국의 노인을 궁궐에 불러 잔치를 베풀었던 ‘기로연’을 부활시키겠다”고 한 것에 대해 사실은 그 같은 대통령의 입장이 자신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세대를 넘어서는 지지를 촉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에 대해 대한노인회 안필준 회장은 “작년과 재작년 열린우리당이 대한노인회에 노인 일자리 알선 사업 예산을 매년 60억여 원씩 줘서 고맙다”고 하며 경로당 활성화와 노인수발보험법 조기 제정 등을 추가로 건의하기도 했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안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정 의장을 수차례에 걸쳐 ‘노인 지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자리에서 한 간부는 정 의장 등 일행에게 “선거 때만 잘하지 말고 평소에도 잘하라”는 주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인들이 정 의장을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 같은 정 의장의 老심 잡기는 지방선거에서도 커다란 도움이 되겠지만, 정 의장에게 있어서도 다시 정치 생명에 날개를 다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지방선거는 대권 도전자들에게 있어서 사전 선거운동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 의장은 누구보다도 일찌감치 내년에 있을 대선을 위한 사전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안간힘을 써보지만…
그러나 정 의장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에는 먹구름이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당초 열린우리당의 텃밭으로 확실시 되던 전북지역에서 생각지 못했던 변수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소속인 강현욱 전북지사가 당내 전북지사 후보 경선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더욱이 강 지사는 경선 불출마 선언에 앞서 23일에는 고건 전 국무총리와 단독으로 만남을 가졌던 것이 알려져 고 전 총리와의 암묵적 연대를 추측하게도 했다. 노인들의 마음을 잡아 하나를 얻었다 생각하니, 또 다른 하나를 잃게 된 셈이다.
강 지사가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고, 고 전 총리의 지원을 받게 된다면 전북지사 선거는 전북 출신인 고 전 총리와 정 의장의 대리전이 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현재 전주고 선배인 김완주 전주시장을 후보로 밀고 있는 정 의장과 강 지사를 밀고 있는 고 전 총리의 싸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북을 확실한 승리지역으로 꼽고 있었던 열린우리당에게 있어서 강 지사의 탈당은 지방선거 전체의 구도는 물론, 선거 결과에 따라 이후 대권 구도의 변화까지 가능하게 하고 있다.
강 지사는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특정 후보의 당원 당비 대납 문제를 지적했지만, 중앙당이 별다른 조치 없이 경선을 강행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며 경선에 불참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탈당이나 무소속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전북 도민의 의견을 들어본 뒤 결정하겠다고 밝힌 강 지사. 그의 거취에 따라 정 의장이 주도하는 또 다른 정치게임이 시작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노 대통령과의 1라운드 싸움에서 승리의 깃발을 쥔 정 의장이 과연 2라운드 3라운드까지 가더러도 지속적으로 승리의 깃발을 잡을 수 있을 것인지, 또 지금 쥐고 있는 깃발이 과연 승리의 깃발이 확실한지 모든 것의 해답은 지방선거에 달려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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