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권 침해와 처벌기준 불투명, 문명국은 이미 폐지
10년이 넘게 죽음의 고비를 넘겨온 사형수 K씨. 착실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았던 그가 생활고에 가방을 뺏으려 환각상태로 사람을 죽인 것이 지금껏 서울교도소에서 사형수로 살아오게 된 연유였다. “포장마차에서 자주오던 공범들과 어울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될 사람이 아니었다”고 교화위원이 말할 정도로 선선한 얼굴의 그는 구치소안에서도 모범수로 꼽힌다. 그동안의 몇 차례 사형집행에 있었던 죽음과의 대면 순간에 떠오르는 건 가족들의 얼굴. 감면되기만을 바라며 여지껏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와 해준 것도 없는데 훌쩍 큰 딸아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기에 그는 불심을 빌려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고 했다. 조용히 합장하며 일어서는 그의 모습은 온갖 번뇌를 다 겪은 부처마냥 평안했다. 바깥세상의 미련을 체념한 듯, 불꽃처럼 나약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삶을 포기한 듯 말이다.
▶생명권 침해로 사형제는 모순
사형제는 형법학의 4대 현안 중 하나로 살인 및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에게 행해지는 최고 극형이다.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사형제는 18세기 계몽주의의 도입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면서 존재의미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사형제를 시행하는 국가에서는 범죄자에 대한 응보와 법의 기강확립 즉 범죄 처벌의 강화로 인해 위화감을 조성하여 재발을 방지하는 목적을 이유로 사형제를 옹호해 왔었다. 그러나 국가가 살인행위를 비난하며 처벌한다고 나서면서 스스로는 살인행위를 하는 행동은 모순이라고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주장한다.
국민의 기본권도 법률에 의해 제한되는데 제한 사유는 공공복리와 국가안정성 보장, 질서 유지 등에 한하며 제한을 한다 해도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할 수 없게 되어 있건만 사람을 죽인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살인범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로서 이미 생명권의 침해하는 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누구는 사형당해야 하고 누구는 사형을 면해야 한다는 판단을 공정하고 일관되게 한 치의 의심 없이 해낼 사법제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형제도의 오류이다.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지 못하거나 더 엄한 판·검사를 만나 사형을 선고받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구의 죄를 뒤집어쓰고 8년 동안 살아온 사형수가 무죄로 드러난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그는 세 번의 사형집행에서 죽음의 문턱을 오가며 살아오다 진범인 친구의 고백으로 감형되어 결국 사형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사형집행들을 무사히 넘기지 못했다면 그는 분명 억울한 원혼이 됐을 것이다. 지금도 적절한 변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법정의 편견에 묻히거나, 과거 인혁당 재 건위 사건처럼 정치적 희생자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사형제 폐지 후, 오히려 범죄율 낮아
과학적 연구 결과 사형이 다른 형에 비해 범죄 억지력이 크다는 보고는 아직 없는 사실도 사형제 폐지론에 한몫한다. 대부분의 살인 범죄는 미리 그 결과를 따져보고 이성적으로 계획한다기보다는 한순간의 참지 못한 감정이나 마약이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보고 돼왔다. 또 연쇄 살인범의 경우는 붙잡히지 않는다는 자신감에서 사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범죄를 저지르는데 결국 범죄 억지력을 강화하려면 과학적 수사로 검거율을 높인다던가 유죄 선고율을 높여서 ‘범인은 반드시 잡힌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폐지론자들은 이같은 ‘범죄 예방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각종 조사 자료와 통계를 보더라도 사형이 범죄 예방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미국 신문 보도에 따르면 사형집행이 가장 많은 미국 텍사스주의 범죄 발생 증가율이 가장 높은 반면, 사형제를 폐지한 아이오와 등 10개주의 살인범죄 비율이 미국 전체 평균치보다 낮았다. 캐나다에서는 1976년 사형제도를 폐지한 이후 범죄 발생률이 40%나 떨어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제도의 기능성에 대한 효율 또한 재고되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형은 형벌의 범죄자에 대한 개선적 기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중 범죄자에 대한 복귀 노력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도 논란이 제기된다. 실제로 인육을 먹으며 세상을 증오했던 지존파는 종교에 귀의해 장기를 기증한 뒤 교수대에 오르는 등 교화의 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피해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가해자를 겨냥한 한풀이가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경제적 어려움을 사회가 지원하는 것이 범죄 예방과 방지에도 훨씬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사형제 폐지는 ‘세계적 조류’
사형제는 중남미 가톨릭 국가들과 유럽 선진국들이 19세기에 물꼬를 트는 것을 시작으로 모잠비크·세네갈 등 아프리카 국가와 부탄·동티모르 등 아시아 국가 등 모두 97개국에서 뒤이어 사형제를 법적으로 폐지해 현재 122개의 나라가 사형제를 폐지했다.
또 토고·지부티·스리랑카 등 25개 나라가 사실상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1980~90년대 군사독재를 벗어나 민주화를 이룬 나라들(아르헨티나)과 사회주의 몰락으로 서구식 규범을 받아들인 헝가리 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들도 대거 사형제 폐지 대열에 동참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치열한 민주화 과정을 겪고도 아직 폐지 전으로 남아있는 미 폐지국 74개 나라 중 하나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법원은 지난 95년 사형제에 대해 “인권 존중에 기반한 사회가 되려면 생명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며 “살인범을 범죄 억제를 위한 본보기로 사형에 처하는 것은 인간을 대상화시키는 행위”라고 위헌 판결을 내려 폐지시켰다.
또한 프랑스는 지난 81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한 뒤 사형제 폐지 법안을 냈는데, 당시 국민의 66%가 사형제를 지지하면서 여론이 존속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회는 “올바른 입법을 하는 것이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라며 법을 통과시켰다. 처음엔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했으나, 현재는 18년이 지나면 가석방도 허용하고 있다. 인권 문제는 다수로부터 소수의 권리를 보호해주기 위한 차원이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다수결 원칙의 입법부보다 사법부가 앞서가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특히 헌법으로 사형이 금지되고 있는 독일의 경우, 잔인한 살인행위 등에 대해선 반드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한 형법 조항마저 인간 존엄성에 위배된다며 지난 77년 위헌이 선언되기도 했다. 지난 달 천정배 법무부장관은 사형제의 존폐여부를 신중히 검토하겠다며 사형 제도를 없애는 대신 가석방이 불가능한 ‘절대적 종신형제’를 도입하는 것을 추진할 것을 밝혔다. 여론은 아직 논쟁 중에 있지만 조만간 세계화의 합류에 동참할 것으로 예상돼 우리사회의 인권의식에 대한 성숙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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