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몸소 실천하는 진관사 회주 도원(道源)스님
부처님께서는 진실된 행에 머무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다운 가르침의 옛길을 걷는 이들이여, 여기에 두 가지 길의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얽매임의 집착에 대하여 애착하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얽매임의 집착에 대하여 싫어하는 견해이다.
애착하는 소견에 의해서는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과 근심 및 그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 번민 등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그 속에 존재하는 이는 항상 고통 속에서 신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싫어하는 소견에 의해서는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이 따라 붙을 수 없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청정하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과 근심 및 그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 번민 등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 ‘아아, 즐겁다’라는 기쁨이 충만한 울림을 소리 높이 외칠 수가 있는 것이다.(增一阿含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얽매임의 집착에 대하여 싫어하는 견해를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며 시종 차분한 어조로 설법을 베푸는 진관사(眞觀寺,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3동 소재) 회주 도원(道源) 스님을 통해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에 대해 들어 본다.
◇東洋哲學은 ‘하화중생’을 위한 방법론의 하나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사찰과 인연을 맺은 도원 스님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수학(受學)의 전 과정을 절에서 시작하고 절에서 끝냈으며, 68년 법대 2학년 재학 당시에는 소백산 희방사에서 있었던 대한불교조계종 정화사건에 휘말려 2년간 투병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철학 공부에 더욱 매진하게 된 도원 스님은 이후 대학원 수료 후 전국 유수의 공찰 주지를 역임하다 울산에 내려와 올해로 오년 째 머물고 있다.
출가와 동시에 학문의 길로 들어섰으니 정진(精進)한 지도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도원 스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른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理下化衆生)’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본 이념의 구현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위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으며 아래로는 중생 제도를 위해 매진하는 진정한 佛道 修行의 실천 上求菩提 下化衆生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 중생제도를 강조하면서 등장한 대승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 즉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타인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공동체적 정신을 표현한 말이다.
즉 보살이 위로는 자신을 위해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깨닫지 못한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보살의 원래적 표현인 보리살타의 의미로도 파악되며, 이때 보살이란 본래 보리살타를 줄인 말로서 보리살타는 인도의 옛말 보디삿트바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보디와 삿트바는 각각 깨달음과 중생을 의미하며, 따라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보살이 마땅히 해야 하는 자리이타행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은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 큰 수레에 탄 대승과 작은 수레에 탄 소승의 차이점 때문이다. 작은 수레에 탄 소승불교에서는 위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나 아래로 있는 중생 제도에는 소원(疏遠)하다.
그러나 대승은 피안의 길을 향해 혼자가 아닌 모든 이가 같이 타고 가는 큰 수레이기 때문에 위로는 보리를 구할 뿐만 아니라 아래로 중생을 인도함으로써 깨달음에까지 이른다. 자신을 위해 위로는 부처님의 법을 구하되 아래로는 중생제도를 위해 끊임없이 수레바퀴를 굴려야 한다는 말이다.
요컨대 진정한 깨달음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일치될 때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를 믿고 따르는 모든 불자들은 위로는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르침을 믿고 수행하며, 아래로는 우리 이웃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불도로 이끌어야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불도수행의 실천이라 할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사회 전체의 도덕적 정신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도원스님은 “제게 있어 동양철학은 ‘하화중생’을 위한 방법론의 하나입니다.
중생들을 인도하는 방법은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난과 도탄에 빠진 중생들에게 나아가야 할 때와 멈출 때를 알려주는 동양철학은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법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에 매진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라며 이를 역설(力說)한다.
◇올바른 선지식인의 카운슬링을 통한 해법만이 불행을 막고 구제 받을 수 있는 길
태어난 연월일시(年月日時)로써 사람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은 인간의 본질을 미혹하는 신념체계인가, 아니면 과학적 근거에 따른 자연철학인가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오랜 세월 우리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하고 있다.
사찰의 유명한 역술인부터 대학가나 쇼핑몰 앞의 소위 ‘돗자리’ 철학관까지 그 범위도 매우 포괄적이다. 이와 관련한 현대의 그릇된 철학관(哲學觀)에 대하여 도원스님은
“책만 읽고 철학을 보는 역량미달의 철학관이 많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올바른 선지식인과의 카운슬링을 통한 해법만이 불행을 막고 구제 받을 길인데, 대부분의 철학관이 그렇지 못합니다. 깊이 없는 학식으로 함부로 남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발상입니다.”라며 일침을 가한다.
흔히 알려진 바대로 동양철학이란 끊임없이 연구하고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경험은 물론 20년 이상의 역학 공부를 통해야만 철학적으로 중생을 인도할 수 있다.”는 도원스님의 말을 결코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미흡하기 짝이 없는 현대 사주명리학의 체계를 반영하듯 영리에 치우친 철학관이 대부분인 작금의 현실은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따라서 “동양철학은 학문이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도원 스님의 말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의 찬란한 등불이 되어 세속을 환히 밝혀주기를.
학문을 할 수 있는 기본적 소양과 자세를 관건으로 삼는 도원 스님은 학회의 조성 등을 통해 인재 양성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특히 제자들에게 동양철학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우주의 이치, 주역(周易), 한학(漢學) 등을 강조한다.
이렇듯 동양철학에 대한 탄탄한 앎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도원 스님은 달마도와 산수화 그리는 화가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에 대하여 “저도 한 명의 사람이기에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중에 힘들고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 둘씩 그리던 것이 그 출발이었지요. 지금은 중생들이 그저 그림을 보고 즐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라며 미소를 짓는 도원 스님의 모습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표본격이 되고도 남음직 하다.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가치 영역 역시 변하게 마련이다. 이에 평생을 공부해 온 철학 지식을 바탕으로 변방의 앞날을 점지하며 중생의 아픔을 치료해 주는 것이 부처님의 법음이라고 생각하는 도원 스님은 이를 그대로 반영하듯 언제나 중생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 주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다.
다소 불편한 신체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철학으로 중생의 어려움을 함께하며 위로하고 해소시키기 위해 애쓰는 스님의 모습은 그대로 하나의 찬란한 등불이 되어 고해(苦海)와도 같은 세속에서 더한 빛을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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