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실미도
[영화리뷰] 실미도
  • 이문원
  • 승인 2003.12.16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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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식 영화'가 주는 모욕감의 대표적 사례
강우석은 장선우, 이명세, 박종원, 정지영 등과 함께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많지 않은 '1980년대 뉴웨이브'들 중 하나이며,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걸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지닌 입지는 위에 언급한 그의 '생존 동지'들과 사뭇 다른 양상인데, 그 차이에 대해서는 그닥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강우석만이 '전문 상업영화 감독'인 것이다. '전문 상업영화 감독'이 모든 면에서 급성장/급변화 중인 한국영화계에서 여전히 영향력있는 감독으로 10여년 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적 재능'이라는 영화제작의 기본요소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점을 통해 찾을 수 있다. 꾸준한 언론플레이, '기획영화'라는 괴물의 창출, 배급망의 절대확보 등이 바로 그것이며, 특히나 강우석의 경우 발빠른 사업적 전략 전환에 비해 영화제작방식 자체의 변화(혹은 진화)는 거의 없어,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대체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영화산업에서나 볼 수 있는 기현상의 대표적 사례로까지 언급되고 있다. 오랜 동안 역사 속에 묻혀진 '실미도 사건'을 거대제작비 투입을 통해 영화화하여, 공개 전부터 끝없이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는 강우석의 신작 "실미도"는, 강우석의 '사업가'로서의 대담한 기획력과 '연출가'로서의 굼뜨고 촌스러운 본성이 기괴하게 혼합된, 다루고 있는 사건보다는 오히려 강우석이라는 인물 자체를 단박에 설명해 줄 수 있는 영화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실미도"는 참아내기 힘들 정도로 구식이다. 눈 감고 대사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모든 상황에 대해 '설명'을 구차하게 늘어놓아야만 '안심'할 수 있는 근대 한국영화 특유의 대사과잉 현상이 여실히 드러나있고, 그나마 대사들도 상당부분이 '과잉성' 대사들로 열혈무드와 억지로 설정된 대립상황을 전혀 완화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반응샷들은 또 어떠한가. 한 순간에 관객들을 20년 전의 극장 안으로 인도하는 '구구절절한' 반응샷들은 이 영화 백미(?)이다. 한 인물이 압축적인 대사만 했다하면, 그에 따른 부연으로 '두 말하면 잔소리지', '그럼 그럼' 따위의, 근래 들어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웅성웅성' 스타일의 '해설성' 배경음향을 깔고 반드시 반응샷이 설정된다. 정말이지 '상황 함축' 내지는 '경제적 샷 구성'이라는 미덕은 온데간데 없고, 아예 무시되고 있는 듯 보인다. '대원들의 능숙해진 몸놀림'을 표현하기 위해 필름을 빠른 스피드로 돌려버리는 '테크닉'에 대해서는 정말 두손두발 다 들었다. 코미디 영화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 너무나도 낡아빠진 테크닉이 이토록 진지하게 쓰여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을 넘어서서 실소까지 터져나온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이 영화의 코믹 요소들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붙어있는 것인가. 주로 임원희에 의해 연출되는 이 상황들은 영화의 무드와 흐름을 확실히 깨고, 그 상황 자체만으로도 너무 억지스러워서 보기에 고통스럽다. 관객들의 값싼 웃음을 얻어내기 위해 영화의 톤 자체를 망가뜨리는 만행을 과연 저질러야만 했던 것인가. 그리고 가장 참아내기 힘든 부분은, 영화제작방식의 고도화, 즉 개성적인 미쟝센과 정확한 편집, 음향과 음악의 조절, 구성의 경제성을 극대화한 플롯조율 등의 요소들을 여전히 무시하고 영화를 찍어내는 강우석의 이상한 오만함과 태만함이다. 그의 영화에서 '스타일'을 찾는 일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이지만, 상업영화로서의 기본적인 완성도조차도 확보되지 못한 그의 영화들은 80년대식의 '대충 비슷하게 찍는' 안이함과 '막무가내로 맞춰내는' 무모함으로 치장되어 근래의 프로페셔널한 영화제작방식에 정면으로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좋은 기억이라면, 이제는 별다른 '연기'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거의 말론 브란도급의 존재감을 지니게 된 설경구의 카리스마적 연기패턴과 구차한 대사들에 현장감을 불어넣는 정재영의 능청스런 대사톤 조절,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허준호의 오랜만의 명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이 한동안 곰곰이 영화를 되짚어봐야 발견될 수 있을 정도로 "실미도"는 너무나도 큰 실망감과 절망감을 안겨준 영화이며, 강우석이라는 뛰어난 사업가이자 태만한 연출가에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만을 선택하라는 주제넘은 충고를 던져주고 싶은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안타까운 느낌이 끊이지 않았다. 분명 '실미도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이슈이며, 영화소재로서도 충분히 드라마틱하며 의미있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그런 전도유망한 기획을 이토록 구식의, 무책임한, 무모한, 태만한 제작방식을 통해 '망쳐버린' "실미도"는, 단순히 '실패한 영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 의해 더 잘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걸작'을 빼앗은'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강우석 감독은 언젠가 반드시, 이런 잘못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이며, 그 대가란 그가 그렇게도 무시하고 있는 '변화'의 형식으로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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