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살할 경우에도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한다고 명시된 약관은 지켜져야 하는가. 2014년 초부터 생명보험업계를 강타하고 있는 ‘자살보험금 논란’이 연말을 앞두고 갈 데까지 갈 기세다.
ING생명이 생명보험사(이하 생보사)들을 대표해 금융당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며 꺼져가던 갈등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지난 6일 ING생명은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이 자살보험금 미지급과 관련해 내린 제재조치에 행정소송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ING생명은 이날 “소송을 통해 생명을 담보로 하는 생보사에서 약관 표기상의 실수로 자살에 대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또 이에 대해 당사가 받은 제재가 합당한지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예정”이라고 밝혔다. ING생명은 김앤장을 법률 소송 대리인으로 선임하고 금융위의 징계 소명 기간인 오는 27일 전까지 법원에 행정소송 소장을 제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수현 금감원장은 이에 같은 날 “행정소송은 보험사의 권리지만 금감원은 당초 방침대로 생보사들이 미지급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또한 12일 금감원은 “지난주부터 자살보험금 미지급 건수와 규모가 적은 5개 생보사에 대해 서면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대형 생보사의 경우 특별현장조사를 실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업계에서는 ING생명이 행정소송 방침을 밝힘에 따라 금감원의 조사가 중단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금융당국의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은 “재판 진행 여부와 현장조사는 별개”라며 선을 그었다.
현재 관련 조항이 ‘약관 표기상의 실수’라며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는 생보사는 비단 ING생명만은 아니다.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등 다른 생보사들도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인 셈이다. 현재 생보사들이 지급하지 않고 있는 자살보험금 규모는 2180억원에 달한다. 또한 앞으로 자살하는 가입자가 발생하면 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ING생명의 대응은 타 생보사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약관엄수” vs “표기 실수”
자살보험금 미지급 논란의 발단은 지난해 금감원의 ING생명 종합감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지난해 8월 금감원은 ING생명을 종합감사한 뒤 ING생명이 재해사망특약 2년 후 자살한 90여건에 대해 200억원의 보험금(2003~2010년)을 미지급한 사실을 확인해 논란이 시작됐다. 금융당국은 자살한 가입자의 유가족에게 약관대로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생보사들은 일반사망 보험금만 지급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재해사망 보험금은 일반사망 보험금보다 2~3배에서 많게는 5배까지도 더 많다.
금융당국과 생보사들의 첨예한 대립은 약관의 해석 방식 차이에서 비롯됐다. 생보사들이 2001년 5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판매한 생명보험 재해사망특약 약관은 2010년 4월 개정되기 전까지 자살에 대한 보험금 지급이 가능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해당 약관은 ‘12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아니하는 보험사고’에서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를 나열하고 ‘특약의 책임 개시일로부터 2년이 경과된 후에 자살하거나 자신을 해쳐 장애등급 1급이 된 경우는 그러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했다. 즉 2년이 경과한 후에 자살하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아니하는 보험사고(12조 항목)에 ‘포함되지 않는다’(문구 중 ‘그러하지 아니한다’를 의미)는 것이다. 이를 다시 풀이해보면 2년이 경과한 후에 자살하면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뜻으로 비춰질 소지가 다분하다.
보험사들은 뒤늦게 이를 발견하고 2010년 4월 이후 약관을 개정했지만 약관 개정 이전에 보험에 가입한 고객은 가입 당시의 약관에 따라 여전히 자살사고에 대해 재해보험금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 금감원은 이 같은 논리로 ING생명에 미지급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생보사들은 억울함을 호소해 왔다. 자살이 재해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하므로 약관 문구에 관계 없이 자살이 재해사망특약의 적용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약관에 나온 ‘재해분류표’에 적힌 32개 항목에도 자살은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약관상 오류’라고는 하지만 금융당국·보험업계·고객 모두 자살은 재해사망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던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생보사들이 자살자에게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할 경우 자살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았다. 힘든 상황에 처한 계약자가 자살보험금을 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생보사들의 이같은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랜 논의 끝에 지난 7월 금감원은 ING생명에 대해 기관주의 및 과징금 4900만원을 부과할 것을 결정했다. 이어 8월 금융위는 ING생명에 4억 53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다른 생보사에도 자살가입자 유가족에 약관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지도 공문을 보냈다.
금융당국의 제재 결정의 근거는 2007년 9월 대법원의 교보생명 판례다. 당시 대법원은 지하철에 뛰어들어 자살한 A씨의 딸이 교보생명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금 청구소송에서 가입자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평균적인 고객의 입장에서 보면 2년이 지난 뒤 자살하면 보험금을 준다고 이해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시했다. 약관이 모호하므로 보험사가 아닌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취지다.
◆약관 베끼다 줄줄이 엮인 생보업계
금융당국의 제재가 확정되면서 약관을 서로 베껴온 다른 생보사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ING생명 뿐 아니라 빅3 생보사(삼성·교보·한화생명)를 보함한 17개 생보사가 줄줄이 미지급 자살보험금 사태에 엮인 상태다. 다만 당시 약관을 따라 쓰지 않았거나 표준약관 개정 이후 신설된 8개 생보사(동양·KB·IBK·푸르덴셜·라이나·카디프생명, 교보라이프플래닛)엔 해당 문구가 들어있지 않았다. 업계에 따르면 2000년대 초부터 생보사들이 분야별로 한 생명사의 약관을 돌려가며 베껴쓴 것으로 알려졌다.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베껴쓴 관행이 단초가 된 것이다.
대법원의 교보생명 판례 이후 생보사들이 줄지어 약관 개정에 나섰고 지난 2010년 4월 금감원이 표준약관을 개정했지만 이미 해당 문구가 포함된 재해사망특약은 총 282만건이나 팔린 뒤였다. 금감원의 조사에 따르면 17개 보험사가 소급해서 지급해야 할 자살사망보험금은 지난 4월말 기준으로 2179억원에 달한다. ING생명이 가장 많고(471건·653억원), 삼성생명(713건·563억원), 교보생명(308건·223억원) 등의 순이다. 미지급으로 인한 지연이자까지 포함하면 금액은 더 불어난다. 추후 자살하는 가입자가 늘어날 경우 최대 1조원까지도 불어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해당 문구는 종신보험이 아닌 다른 상품에도 포함돼 있어 알려진 규모보다 훨씬 늘어날 수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이 같은 약관 조항이 포함돼 있는 일부 암 보험 상품도 존재하고 있어 암 보험에 들었는데도 가입자가 자살하면 자살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경우까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월 말 대부분의 생보사들은 금융당국의 지급 권고에 거세게 반발, 이를 거부하고 미지급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결정조차도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의 조사를 받고 있어 생보사들은 갈수록 수렁에 빠지고 있다. 공정위는 이 같은 결정이 담합이라고 보고 지난 10월 생명보험협회(이하 생보협회)를 방문해 조사를 진행했다. 생보협회는 9월 23일 생보사들 실무자 모임을 만들어 자살보험금 지급 거부를 위해 소송을 제기하자는 논의를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어 공정위는 ING생명,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등에도 추가 조사를 실시하며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금융당국과 공정위까지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도 여야가 한 목소리로 자살보험금 지급을 촉구하는 등 국회까지 가세한 모양새로 흘러가며 생보사들은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다.

◆행정소송 불사하는 ING생명, 왜?
자살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갈등이 재점화되는 모양새지만 사실 ING생명의 이러한 소송 행보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돼 왔다. 지난 10월 열린 국정감사에 참석한 이기흥 ING생명 부사장은 자살보험금 지급 여부에 대한 질문에 “좀 더 검토하겠다”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송구스럽게 생각하지만 추가적인 법적 판단을 받은 후에 처리할 예정”이라고 밝혀 소송 가능성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생보사들은 금융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ING생명이 행정소송까지 불사하는 것에 대해 다른 시각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ING생명이 이렇게 금융당국과 전면으로 소송을 진행하는 것을 두고 대주주가 사모펀드이기 때문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ING생명의 대주주는 국내 최대 규모 사모펀드 MBK파트너스다. 사모펀드(PEF)는 고수익기업투자펀드라고도 하며 보통 비공개로 투자자들을 모집, 자산가치가 저평가된 기업에 자본 참여를 유도해 기업가치를 높인 다음 기업주식을 되파는 전략을 취해 일명 ‘기업사냥꾼’으로 불린다. ING생명은 본래 네덜란드 소재 ING Insurance International II B.V.가 지분 100%를 보유한 자회사였으나 지난해 12월 24일자로 MBK파트너스가 ING생명 인수를 위해 설립한 투자목적회사인 라이프투자유한회사를 통해 1조 8천억원 가량으로 지분을 전량(820만 주) 인수했다.
일각에서는 최대주주가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사모펀드인 만큼 ING생명이 자살보험금 지급으로 볼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소송을 준비했다는 시각을 제기하는 것이다. ING생명의 미지급금은 653억원으로 자본금 820억 원의 79%에 달해 ING생명으로서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MBK파트너스 CEO인 김병주 회장은 고(故)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의 넷째 사위이며 최근에는 ‘씨엔앰 먹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종합유선방송사업자 씨엔앰을 인수한 뒤 펀드 만기 시점이 다가왔음에도 회사 덩치가 커지기는 커녕 사정이 나빠져 이익을 내기 위해 무리한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는 논란이다. ING생명 역시 한차례 구조조정의 홍역을 앓은 바 있다. 또한 MBK파트너스의 자금 원천이 대부분 외국계라는 점도 세간의 시선이 곱지 못한 이유다.
생보업계의 전반적인 반응도 ING생명의 소송 제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다른 생보사들도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한 유가족들을 상대로 지급해야 할 보험금이 없음을 주장하는 채무부존재확인소송을 제기했거나 할 방침을 세우고 금융당국과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ING생명 역시 이러한 흐름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하지만 역시 제재 자체에 대해 정면으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이례적으로 보인다.

◆생보업계, 위험 안고 ‘다발적 공세’
연초부터 한 해가 다 가도록 결판이 나지 않는 자살보험금 논란은 ING생명의 행정소송 제기 방침으로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소송기간동안 생보사들이 시간을 벌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유가족들은 지난 1일 직접 ‘생명보험금청구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그 중 한명은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했더니 생보사로부터 소송을 당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고 있는 셈이다.
생보사들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차갑다. 가입자에게 불리한 내용은 원칙대로 처리함을 자랑삼아 약관을 들이밀며 ‘전가의 보도’ 마냥 휘둘러 오던 생보사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실수였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갈등이 장기화되면 생보사들은 당장 급한 불을 끌 수는 있겠지만 긴 소송전 끝에 패소할 경우 지급 지연에 따른 지연 이자까지 지급해야 해 위험 부담도 상당하다. 그만큼의 리스크를 안으면서까지도 금융당국과 척을 질 것을 결의한 생보사들이 법정 다툼 끝에 원하는 바를 얻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