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집권 4년차가 되면 측근비리가 드러나고, 5년차가 되면 친인척 비리가 밝혀지며 퇴임 후에는 전직 대통령이 고초를 겪는 것이 우리 역사다.” 이명박 정부 시절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이런 경고를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예언이라도 한 듯, 이명박 정부에서도 임기 말 측근비리와 친인척 비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쏟아져 나왔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의 권력구조 형태상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대통령 측근들은 제왕적 권력을 쥐고 있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한 탕’의 유혹에 빠져들고, 그런 문제는 곧바로 대통령 책임으로 전가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87년 직선제 이후 역대 정권들이 빠짐없이 겪었던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의 핵심 이유로 꼽힌다. 역대 정권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어느 정권 하나도 순탄하게 임기를 마무리 지은 경우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대 정권들은 어땠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를 수립하고 군부 잔재를 청산하는 등 임기 동안 평가 받을 만한 업적들을 남겼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임기 말인 1997년 2월 자신의 차남 김현철 씨가 연루된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급격히 레임덕에 빠져들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 여기고 있다”며 “만일 제 자식이 이번 일에 책임질 일이 있다면 당연히 응분의 사회적 책임을 지도록 할 것”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김 전 대통령은 김현철 씨가 구속된 이후 IMF 외환위기까지 맞으면서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린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최측근이자 동교동계 좌장으로 불리는 권노갑 의원이 한보 비리와 16대 총선 직전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취임 1년을 넘기자마자 ‘옷 로비’ 의혹 사건으로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고, 임기 말인 2002년 6월에는 자신의 두 아들이 잇따라 구속되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몇 달 동안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왔다”며 “국민께 마음의 상처를 준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으로 살아왔다”고 사과했다. 이로 인해 김 전 대통령 역시 여당을 탈당하고, 레임덕에 시달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역대 어느 정권보다 도덕성을 내세웠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측근비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집권 초 ‘영원한 집사’로 불렸던 측근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기업으로부터 수억 원대 뇌물을 받아 구속됐고, 참여정부 실세이자 오른팔로 불린 이광재 의원이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도덕성에 큰 흠결을 남겼다.
이광재 의원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강원도지사에 당선됐지만, 끝내 지사직을 중도에 잃고 말았다. 왼팔로 불렸던 안희정 충남지사 역시 지금은 지방자치단체를 이끌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 취임 직후 대선자금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구속됐던 바 있다.
특히, 노 전 대통령도 친인척 비리가 큰 문제였다. 노 전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 씨가 구속된 것은 물론, 부인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노건호 씨도 모두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굴욕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참여정부의 도덕적 우월성을 큰 가치로 여겼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최측근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비리 의혹에 휩싸이고 처벌받게 되자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렀다.
이명박 대통령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측근 및 친인척 비리가 판을 쳤다. 정권 최고 실세로 불렸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은 파이시티 개발사업 인허가 청탁 등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고, 이른바 ‘왕차관’으로 불렸던 박영준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강희락 전 경찰청장, 배건기 전 민정수석실 내부감찰팀장, 장수만 전 방위사업청장, 최영 전 강원랜드 사장 등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측근들의 비리 및 의혹이 굴비 엮듯 쏟아져 나왔다.
특히, 이명박 정권의 ‘상왕’으로 불린 이 전 대통령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구속 및 장남인 시형 씨에 대한 ‘내곡동 사저 불법 매입’ 사건 등 친인척 비리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김윤옥 여사의 사촌인 김옥희 씨 사건 또한 마찬가지였다.
◆靑, 친인척 일거수일투족 감시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도 이 같은 역대 정권들의 전례를 답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최근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측근 및 친인척들에 대해 고강도 감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4일 <TV조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통해 거의 매일 친인척 관련 동향을 보고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역대 정권들이 임기 말 친인척 비리 문제로 몰락의 길을 걸어왔던 것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매체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씨 부부와 박지만씨 부부 이발비까지 살필 정도로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여권 고위 관계자는 지난 8월께 민정수석실 관계자들이 박근령씨 남편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를 만났다는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신 씨가 박근혜 대통령 명의로 배달된 박근령씨 생일 축하난을 박 대통령을 사칭해 조작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신 씨를 만난 민정수석실 관계자들은 신 씨가 주로 탑골공원 근처를 걷고, 3500원짜리 이발관을 자주 찾는 등의 일상생활까지 모두 파악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지만 씨 부부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 취임 이후 박지만 씨가 청와대와 사실상 연락을 끊고 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 가운데, 청와대가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로 불리는 정윤회(59) 씨에 대해 감찰 조사를 벌였다는 언론 보도가 나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청와대가 정 씨에 대해 감찰 조사를 벌였다가 한 달 만에 감찰이 중단되고, 감찰을 진행하던 실무자는 사실상 좌천성 원대복귀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24일 <세계일보>는 ‘靑 정윤회 감찰 돌연 중단 의혹’ 제하의 기사에서 청와대가 올해 초 정윤회 씨의 공직자 인사 개입 의혹에 대해 감찰 조사를 벌였지만, 한 달 만에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당시 민정수석실 소속 행정관 신분으로 감찰을 진행했던 경찰청 출신 A경정은 다시 원래 소속으로 복귀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A경정 후임은 정윤회 씨 의혹에 대해 더 이상 조사를 벌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사정기관 관계자는 “감찰을 진행하던 실무자가 인사 시즌도 아닌 때에 갑자기 전보조치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며 “누군가 감찰을 중단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보도는 파문을 일으켰고, 청와대는 이날 즉각 설명자료를 내고 “사실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청와대는 이와 관련, “민정수석실에서는 정 씨에 대해 감찰을 실시한 바 없다”고 거듭 해명했다. 또, 감찰을 진행하던 A경정에 대한 좌천성 인사조치 의혹에 대해서도 “청와대 행정관의 인사 시기는 따로 정해진 바 없고 필요에 따라 수시로 하고 있다”며 “청와대는 사실이 아닌 기사에 대해서는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선 실세 정윤회, 이정도일 줄은…
청와대의 이 같은 해명에도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유기홍 수석대변인은 이날 오전 브리핑을 통해 “정윤회 씨의 인사청탁 의혹과 청와대 감찰중단 의혹에 대해 검찰의 즉각적인 수사를 요구한다”고 밝히고 나섰다.
유 대변인은 “지난 1월 초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정윤회 씨가 고위공직자 인사에 개입하고 그 대가로 수억 원을 받는다는 첩보를 감찰하고 한 달 만에 중단한 것”이라며 “더구나 정 씨에 대한 감찰업무를 맡은 실무자는 좌천성 인사 조치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 씨를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노출됐고 감찰 중단 압력을 거부하자 보복성 인사를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며 “정윤회 씨에 대한 감찰과 관련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청와대는 한 점 의혹 없이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청와대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한데 대해서도 “믿어야할지 의문”이라며 “정윤회의 ‘정 자(字)만 나와도 청와대까지 벌벌 떠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의 의혹은 깊어만 간다. 정윤회 씨의 인사청탁 의혹 및 청와대 감찰에 대한 압력의 전모에 대해 검찰의 즉각적 수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세계일보>도 이튿날인 25일 다시 반박성 기사를 냈다. 이 신문은 ‘정윤회 감찰라인 무슨 일이…’ 제하의 보도에서 지난 4월 사표를 제출한 조응천(52) 전 공직기강비서관 문제를 지적했다. <세계>는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의 사표 제출이 알려진 것은 지난 4월 22일이고, 이보다 두 달 정도 앞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소속 A경정이 경찰청으로 원대 복귀했다”며 “청와대는 ‘개인 신상’, ‘통상 인사’라고 각각 해명했지만, 공직자들에 대한 비위 확인, 감찰 업무를 맡았던 두 사람이 잇달아 청와대를 떠난 배경에는 이들의 ‘업무’와 무관치 않다는 게 주변 관계자들의 전언”이라고 밝혔다.
<세계>는 이어, “올 들어 공직기강비서실에서는 현 정부의 ‘숨은 실세’로 불리는 정윤회 씨 비위 의혹에 대한 감찰이 시작됐다. A경정이 입수한 첩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내부적으로 정 씨가 박 대통령의 정치인 시절 측근으로 활동했던 점을 감안해 감찰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A경정이 복귀하기 직전 청와대 내부에서는 감찰 내용의 외부 유출을 둘러싸고 투서 소동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투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거명된 A경정의 원대 복귀조치가 진행됐고, 조 전 비서관의 반대에도 결국 인사 조치가 취해졌다”며 “공교롭게도 조 전 비서관의 사퇴 과정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거듭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이 잇달아 중도 하차한 배경에 업무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나 외압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며 “A경정의 원대 복귀 이후 정윤회 씨에 대한 감찰이 사실상 중단되고 조 전 비서관 사퇴로 핵심 기능이 민정비서관실로 이관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사정당국의 관계자는 ‘조 전 비서관 사퇴 이후로 공직기강비서관실은 거의 와해됐다는 지적이 나온다’며 ‘정윤회 씨 감찰의 후폭풍을 맞은 셈’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보도대로라면,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박근혜 대통령 측근 비리 문제로 감찰에 나섰다가 역풍을 맞고 사실상 조직 와해 수준까지 가게 됐다는 얘기다. 박근혜 정권의 보이지 않는 권력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이 가늠할 수 없는 권력이 부패하게 될 경우 박근혜 정권 역시 역대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