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선진화법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국회선진화법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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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연말이면 정치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파행’과 ‘지각’이었다. 새해 예산안 협상 과정에서 여야 간 간격이 좁혀지지 않으니 다툼이 일어나기 일쑤였고 또 그 과정에서는 고성과 막말, 심지어 육탄전을 방불케 하는 몸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헌법 제54조 2항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는 규정을 항상 어기고 지각해서 처리하곤 했다.

회계연도 개시일은 매년 1월 1일이므로, 30일 전인 12월 2일이 우리 헌법이 정하고 있는 법정처리 시한인 것이다. 그런데 여야는 지난 11년간 단 한 번도 12월 2일까지 새해 예산안을 처리해본 일이 없었다. 국민은 이런 여야 정치권이 꼴도 보기 싫었고, 연말이 되면 늘상 이런 이유들로 무당층이 증가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그런데 올해부터 시행된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이런 극한적 대치나 지각 사태는 피해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선진화법은 새해 예산안을 12월 2일 본회의에 자동 부의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여당은 느긋하게 시간을 기다리고 있고, 야당은 점점 더 조급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국회선진화법에 대해 지금까지는 여당이 ‘국회 마비법’이라며 즉각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왔었다는 점이다. 선진화법은 각 상임위원회에서 여야 합의를 이루지 못한 쟁점 법안들에 대해 ‘안건 신속처리제도’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상임위원 3/5 이상 또는 전체 국회의원의 3/5 이상 찬성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임위든 전체 국회의원이든 과반 이상이 찬성해야만 쟁점 안건들에 대해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현재 여야 의석수 구조로는 이런 제도를 활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동안 시급한 법안이 있더라도 야당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여당은 무엇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었던 것이다. 여당 내에서 국회선진화법을 두고 “식물국회를 만든다”며 지속적으로 폐기 주장이 나왔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면, 야당은 이렇게 국회의장 직권상정이 쉽지 않다는 점 때문에 그동안 국회선진화법을 충분히 활용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연말 예산정국이 되면서 여야의 이런 입장이 확 바뀌게 됐다. 국회 선진화법에 따라 여당은 힘쓰지 않고 새해 예산안을 본회의에 자동 부의시켜 처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당 지도부에서는 “선진화법 체계 하에서 우리가 과반수가 훨씬 넘는데도 불구하고 법률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예산안도 국회선진화법 체제 하에서 처리되어야한다”며 “12월 2일 법과 원칙에 따라 선진화법 체제 하에서 시행되는 첫 연도이기 때문에 저희는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씀드리면 선진화법 대로 가는 것”이라는 주장이 빗발쳤다.

이를 두고 야당은 또 “새누리당이 예산안 심의는 거북이걸음을 하면서 12월 2일이라는 국회선진화법상의 법정처리 시한만을 주장하며 예산안 강행처리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듯하다”며 “하지만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을 대하는 태도가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는 것이어서 지켜보는 국민이 낯 뜨거워하고 있다”고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냈다. 그동안 국회선진화법 위헌을 주장해오다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니, 왜 국회선진화법을 적극 활용하려 드냐는 주장이었다. 이 때문에 야당은 “국회선진화법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말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이 국회선진화법을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 청구 하려던 계획부터 철회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야가 지금 국회선진화법을 두고 모두 똑같이 아전인수격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 앞에 반성하겠다면서 합의하에 만들었던 국회 선진화법을 두고 여당도 야당도 똑같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합의 하에 법을 만들어놓고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만 활용하려는 모습은 국민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다. 싸움질보다는 낫겠지만, 이 또한 국민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바는 아니었다는 점을 여야 정치권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박강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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