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불화로 인한 스트레스로 술독에 빠진 주부들
“술 마시고 척추 골절을 당해 입원해 있는 상황에서도 병원 계단에서 술을 마셨어요.” “고2 아들에게 술심부름을 시켜요. 술을 마시지 않으면 가족을 알아볼 수 없어요.” “1주일 동안 소주 한 박스를 마셔요. 밥도 먹지 않아요.” 주부 알코올 중독자들이 소리 없이 늘고 있다. 벌써 60여만 명에 이른 이 ‘키친 드링커’(주방에서 술을 마신다는 뜻)들은 아이들과 남편이 집을 나간 후 적적한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음주를 즐긴다. 때문에 가족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가 이미 중독된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 심각성을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술에 중독된 엄마들의 술 냄새에 불안한 아이들과 늘어나는 가정파탄은 ‘주부 알콜중독’의 심각함을 보여준다.
▶‘끊고 싶어도 못 끊는다’
30대 주부 A씨는 남편과 두 아이가 집을 나서면 집안 곳곳에 숨겨두었던 술병을 찾는다. 매일 막걸리 2병과 소주 1병을 마셔야만 한다는 그는 둘째아이 출산 후 앓았던 우울증 때문에 술을 찾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다”며 “내 의지로는 술을 끊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술만 먹지 않으면 아이들 숙제도 돌보고 남편이 오기 전에 저녁밥을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은 일반 주부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의 숨소리에 섞인 희미한 술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술 냄새나는 엄마와 떨어져 살지도 모른다는 심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 핑계로 매일 늦게 들어오는 남편 때문에 불면증이 생긴 40대 Y씨는 처음에는 잠을 자기 위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병이면 충분하던 술이 갈수록 두병, 세병 늘어가면서 어느새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그녀 역시 이제는 쳐다보기도 싫은 술이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중인 H씨는 남편의 사업부도 후 시어머니의 ‘네 탓이야’라고 몰아세우는 행동에 상처입어 술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피까지 토하면서도 술을 먹어 결국 병원에 입원한 그녀는 “취해 잠이 들었다 깨면 죄책감에 시달리니까 그걸 이기려고 또 술을 마셨다”고 말했다.
이처럼 늘어가는 주부들의 술에 대한 갈망은 대체적으로 집안에서 생기는 스트레스와 가정불화로 인해 생겨나고 있었다. 시어머니와의 충돌이나,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 혹은 상습적인 구타를 당하거나 인격적으로 무시당한 여성들은 술을 향해 손을 뻗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성들에게는 술에 대해 관대함을 보이지만 여성의 경우 알콜중독이라고 하면 냉대와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이 우리사회의 현실로 알콜중독을 겪고 있는 주부들은 음지 속에서 마땅한 치료와 위로도 없이 더욱 고통받고 있다.
▶커지는 가족들의 고통
술 마시는 엄마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렇게 술에 취한 엄마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 받게 되는 고통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불안한 가정환경에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받게 될 정신적 충격과 이로 인한 성격 발달상의 장애가 아이들을 괴롭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정상적인 가정환경에 배제되어 엄마로부터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 없이 자라나 성인기에는 우울증을 겪기 쉽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딸일수록 우울증상을 느끼기 쉬운데 이는 유전적인 영향이라기보다는 알콜 중독의 엄마 밑에서 겪었던 심리적 결함과 일반 가정과는 다른 환경적 원인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다.
또한 어릴 적부터 술을 과하게 마시는 부모를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자라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음주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돼 부모처럼 알콜중독이 될 확률도 높다. 조사에 따르면 술에 대한 해악과 부작용에 대한 정보가 흐릿한 상태에서 알콜 중독자의 부모 밑에서 자식들이 알콜 중독이 될 확률은 약 82%로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또한 자식 중 아들이 알코올중독이 될 확률은 약 48%로 딸보다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주부가 임신 중에 중독 증세로 술을 마시게 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미숙한 상태의 태아에게 알콜섭취로 생기게 되는 각종 임상적 질병들은 태아성 알코올 증후군, 성인기의 알코올중독, 과잉행동 장애 등으로 알려져 있다. 심각한 상태에는 기형아의 출산 또한 초래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가정에 불안한 요소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이혼이 늘어 가정파탄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 또한 커져가고 있다.
▶여성 알코올 왜 위험한가
날이 갈수록 음주로 인해 사회적, 직업적 장애가 나타나는 여성들은 매 년마다 3배가량 늘어 여성 알콜 중독의 숫자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의료학적으로 알콜 중독에 따른 피해가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아 여성 알콜중독의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알코올 중독 여성 환자중 반수 이상은 생리불순이고, 80% 정도가 불감증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월경 전후의 여성은 알코올로 인해 여성 호르몬중의 에스트라디올이 높아져 간장의 알코올 분해효소의 활성을 방해하여 취해있는 시간이 길게 되고 숙취감도 더 길게 되는 것이다. 연구 보고에 의하면 여성 알코올 중독증 환자의 30%는 월경 전기 대량 음주자라고 한다. 경구 피임약을 복용중인 여성도 호르몬의 양이 많기 때문에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한편, 폐경기의 여성은 여성 호르몬이 적기 때문에, 알코올 대사를 온화하게 해주던 제동 능력이 약해져 갑자기 대량음주를 하기 쉬워진다.
특히 여성에게서 보이는 피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이 감정적인 피해로 술을 마시면 느끼게 되는 심한 죄책감, 후회감 그리고 수치심을 견디기 힘들어 중독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심리적으로 예민한 여성들은 이 감정과 고통으로 더 술을 마시게 되고 그러면서 술을 마시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한다. 다사랑중앙병원 이종섭 원장은 “주부의 경우 가족의 관심만 있어도 알코올 의존증의 재발을 99% 막을 수 있다”며 여성 알코올 중독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의지 못지않게 가족이 알코올 중독을 질병으로 받아들이고 치료에 적극 동참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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