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탤런트 홍성민,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다
"그 아이가 귀머거리에 장님에 벙어리라는구나. 하지만 누가 알겠니? 마치 잠겨 있는 금고 같아서 일단 열어 보면 그 속에 보석이 담겨 있을지…"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상연된 연극 '헬렌켈러'속에서 시각장애 탤런트 홍성민의 극중 대사다. 비록 공연 속 대사이기는 하지만 앞을 볼 수 없는 홍씨의 상황과도 같은 그의 대사. 홍성민은 헬렌켈러가 다니는 맹학교 교장역할을 맡아 단 한 씬, 5분에 불과한 역을 전력투구하여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헬렌켈러와 애니 설리반 선생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 구실을 했던 교장은 희망 없이 살던 헬렌에게 꿈을 꿀 수 있게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로 연극을 통해 새로운 연기로 거듭난 그와 닮은꼴 이였다.
당뇨합병증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탤런트 홍성민씨(66)가 연극무대에서 제2의 연기인생을 싹 틔웠다. 홍씨는 올해로 데뷔 45년째다. 그중 38년간 그는 앞을 보는 배우였다. 하룻밤에 대사 200∼300마디쯤은 거뜬히 외우는 실력파로서 TV 드라마 ‘제1공화국’의 박헌영 같은 강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것이 2004년.
★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배우로서 제가 참 행운아죠. 연기자는 누구나 체험을 통해 자기 역할에 실감을 더하고 싶어 하는데 앞을 못 보면서 맹인 연기를 할 수 있으니….” 처음부터 운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끝났다”고 자포자기했다. 몇 달을 폭음으로 보내다가 이러다가는 1년도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앞을 못 보는 내가 눈 뜬 사람들을 이해하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을 뒤집으니 세상일이 다르게 이해됐다. 왜 장애인들이 ‘정상인’이라는 말 대신 ‘예비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쓰는지 공감하게 됐다. 그 자신이 환갑 넘어 신체 기능 일부를 잃은 중도 장애인이었다. 없으면 좋을 일이지만 누구나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안고 사는 게 인생이었다.
★ 눈부신 가족의 힘
무엇보다도 그가 다시 배우로서 무대에 오르겠다는 의욕에 불을 지핀 건 아내였다. 계속 집안에만 '파묻혀 살던' 그는 어느 날 밖에 나가자는 부인의 성화에 따라 나섰다. 그때 따라간 곳은 사회복지관. "문 앞에 들어서니 누군가가 뛰고 크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당연히 뛰어 다니는 소리를 들으니 여기 시각장애인은 없나보다 생각했죠. 하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당시 사회복지관에서 활기찬 기운을 느낀 홍성민은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빨리 치유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다시 연극 무대에도 오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 중엔 오랫동안 집안에만 있는 이들이 있어 안타깝다고. "아직도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내는 이들이 있는 걸로 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집밖을 나와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좋다. 장애는 불편한 것일 뿐이다. 움 추린 몸을 펴고 나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 사람이 그리웠다
40년에 이르는 연기생활, 그리고 30여 년간 앓아온 당뇨병 후유증으로 인한 시력상실. 주변 사람들과 팬들은 연기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배우 홍성민(66)은 그의 이름 앞에 붙음직한 '원로' '시력상실'의 한계를 걷어냈다.
"시각장애인은 정말 고독하다. 다른 이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없고 누가 옆에 와도 알 수가 없다"고 밝힌 그는 "내가 이렇게 되니 사람 냄새가 정말 그리웠다. 시력을 잃은 후 5개월 동안은 사람들이 놀릴까봐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이 더욱 그리워졌다"고 속엣 말을 꺼냈다.
★ 다른 이의 도움을 고마워하는 여유
장애를 삶의 ‘다른 상태’로 받아들이면서 그는 배우로서 다시 세상에 나섰다. 지난해부터 TV 출연도 하고 연극 무대에도 선 그는 다른 이의 도움 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고마워한다. “눈 대신 손 발 귀 다 움직여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요. 그래도 안 될 땐,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눈이 다 내 눈이라고 생각하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선행할 기회도 생기는 거지 하고 마음 편히 여깁니다.”
앞을 못 본다고 배우로서 살아온 세월마저 헛것이 되지는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보는데, 나는 남을 보지 못하는 두려움. 그것은 일찍이 신출내기 연극배우 시절 조명이 환한 무대에 서서 컴컴한 객석을 바라보며 느꼈던 것이다. ‘그게 무서웠다면 나는 결코 연기자가 될 수 없었다’는 자신감이 앞 못 보는 그를 당당하게 만들었다.
★ 내면으로 하는 연기
“어둠 속에서 하는 연기는 확실히 달라요. 눈이 안보이니 내면에 더 충실해져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감정들이 올올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상대 배우의 얼굴과 무대가 안보이니까 답답하기야 합니다.” 홍씨는 “시력을 잃은 후 보조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길을 나섰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며 “연극 연습을 시작하면서 첫발을 내디디는 돌쟁이가 된 심정”이라고 말했다.
홍씨는 후배가 읽어주는 대사를 수십 번 씩 따라 읽고 집에 와서는 아내가 녹음해준 테이프를 듣고 또 듣는다고 했다. 시력을 잃은 홍씨가 재활훈련을 받는 모습은 지난해 KBS 2TV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홍씨는 “시력을 잃고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후배들이 용기를 줘서 연극무대에 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진정한 사람의 내음
홍성민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건물을 오르내릴 때 불편함을 느끼지만 연기를 한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며 푸근한 봄날 햇살 같은 밝은 표정을 짓는다. "배역의 비중이 작아도 상관없다. 내가 연기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한 그는 "후배들의 연기를 소리로 들을 수 있고 활기찬 분위기를 느끼게 돼 좋다"며 뿌듯해했다. 시작장애의 한계를 딛고 자신의 무대로 돌아 온 홍성민. '사람냄새 그립다'는 그에게서 진정한 사람의 내음이 나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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