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회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 파문이 청와대 비서실과 내각을 뒤흔들고 있는 것은 물론, 각계각층의 연루자들까지 속속 드러나면서 당초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돼온 연말-연초 개각설이 현실화 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많은 의혹들에 대해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선을 그었고,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당사자 정윤회 씨도 ‘무고’까지 언급하며 박 대통령과의 관계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문건 내용의 사실유무를 떠나 청와대 문건이 외부로 유출돼 이 같이 국가적 혼란이 초래된데 따른 책임은 누군가 져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청와대 비서실의 전면적 쇄신 개편부터 이를 계기로 내각 관료들에 대한 교체까지 개각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고개를 들고 있는 이유다.
문건 작성자와 지시자, 그리고 유출자만의 문제가 아닌 그들을 지휘통솔해온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특히 그 책임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더군다나, 김 실장은 앞서 관련 보고를 받았으면서도 풍문으로 치부해 자신의 선에서 무마해버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그동안 끊임없이 교체설이 제기돼 오던 김 실장이 결국 이렇게 물러나게 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퍼지고 있다.
◆정윤회 파문 속 타깃 된 김기춘-3인방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운 이번 사태는 일단 청와대 내부의 기강 및 갈등문제를 여실히 드러낸 것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집권 3년차를 앞둔 시점에서 공직사회 전반에 대한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공무원연금 개혁과 규제 및 공기업 개혁 등 정부의 주요 과제들이 자칫 이번 이슈에 함몰돼 버려 추진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때문에 정치권 안팎에서는 문건 파장에 대한 국면전환과 맞물려 청와대 비서진 개편과 더불어 개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파장은 정치권에서 교체설이 끊임없이 제기됐던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해 청와대 핵심 비서진 3인방 등에 대한 거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내각과는 달리 청와대는 이번 내부 문건 유출 및 정씨의 국정개입 의혹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서다.
특히 김 실장은 이번 사태와 도의적 책임 등으로 연관돼 있는데다 최근 ‘사상’ 문제에 휩싸인 김상률 교육문화수석 인사에 대한 논란까지 겹쳐 곤혹스런 입장에 내몰렸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김 실장은 이번 사태가 터지기에 앞서서도 꾸준히 교체론에 시달려왔던 바 있다.
김 실장은 또, 이미 지난 1월 22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한 적이 있어 정·관계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은 격무로 인한 건강상의 이유와 더불어 교통사고를 당한 장남인 김성원 씨의 장기 입원 상황 등으로 사퇴를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의 간곡한 만류로 김 비서실장은 사의를 접었던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 이전, 연말연시가 다가오면서 다시 사퇴론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김기춘 실장을 교체하게 될 경우, 홍사덕 민화협 상임의장이나 권영세 주중대사 등이 물망에 오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야당에서는 정윤회 수사에 대한 검찰 수사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김기춘 실장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으로 강하게 사퇴를 압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비대위원은 지난 5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문고리 권력 3인방을 청와대에 그대로 남겨둔 채 검찰 수사를 기대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고 지적했다.
박 비대위원은 이어, “김 비서실장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모든 문건을 보고 받았고 4월에는 문서유출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며 “국기문란 행위를 알고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은 비서실장의 직무유기가 도를 넘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문재인 비대위원도 “비선실세 국정농단 1차 책임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도록 가이드라인을 철회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해야 한다”며 “검찰이 공정하게 수사하도록 측근과 비서실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김기춘 실장 사퇴를 요구했다.
같은 날 반쪽으로 진행된 국회 운영위에서도 야당 의원들은 김기춘 실장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냈다. 특히, 야당 의원들은 김기춘 실장이 지난 7월과 10월 국회에서 ‘맹세코 비선라인은 없다’고 밝히고, 이재만 총무비서관도 지난 7월 국회에서 ‘정윤회 씨와 2003년이나 2004년 이후 접촉한 사실은 없다’고 말한데 대해 위증 의혹을 제기하며 이에 대한 조치를 촉구했다.
전정희 의원은 “김기춘 실장이 몰랐다면 무능하고 알았다면 국회에서 위증한 것으로 국회 조치도 있어야 한다”며 “이번에도 검찰이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정치검찰의 모습을 드러내면 국회는 특검과 국정조사를 이뤄내야 한다”고 말했다. 유대운 의원은 “청와대는 정윤회 씨 등 비선라인의 국정개입 및 측근 권력암투에 대해 입 꼭 다문 채 정윤회 문건이 유출된 것을 국기문란으로 규정하고 사실상 검찰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며 “(의혹이)사실로 밝혀지면 (김기춘 비서실장은) 위증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최민희 의원은 “국회가, 특히 운영위가 청와대가 제대로 국정하고 있는지 감시하기 이전에 청와대에서 실세로 지칭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거짓말에 대해 그냥 둬서는 안 된다”며 “이 거짓말에 대해서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운영위가 여야 합의로 반드시 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기춘 마음 정했나?
한편, 이 같이 사퇴 요구가 빗발치고 정윤회 파문 속에서 곤혹스러운 입장이 된 김기춘 실장이 지난 7일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도부의 청와대 오찬자리에서 자신의 가정사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8일, <중앙일보>는 오찬 참석자들의 전언을 통해 새누리당 의원들과 한 테이블에 앉은 김 비서실장이 “지난해 말 아들이 갑자기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다. 개인적으로도 어려운 일이고, 아내는 늘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김 비서실장의 외아들인 김성원(49)씨는 지난해 12월31일 불의의 사고로 의식불명에 빠져 현재까지 입원 중이다. 올해 초 의사인 성원 씨의 사고소식이 알려지면서 한때 김 비서실장이 자진사퇴할 것이란 얘기가 돌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 뿐인 아들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김 비서실장은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수행해왔다. 당시 다른 청와대 관계자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김 비서실장은 지난 7월 세월호 국정조사 기관보고에서 “참척(慘慽: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이라는 불행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유족의 슬픔을 모를 것으로 생각한다”며 “저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일련의 심경을 내비친 적이 있다. 이는 자녀를 잃은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김 비서실장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자신의 가정사를 공식석상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이른바 ‘정윤회 문건’이 정국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공직에 임하고 있는 어려운 심경을 완곡하게 피력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김 실장은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밖에 없는 분이다. 나는 비서지만 ‘이래서 대통령은 다르구나’하는 걸 느낀다”며 박 대통령의 애국심을 여러 차례 강조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개각한다면 중폭이상 관측
이처럼 청와대에서는 김기춘 실장과 문고리 권력 3인방에 대한 교체 여부가 최대 관심사로 부상해 있는 가운데, 내각 쪽은 인사 폭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교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국무총리와 함께 사퇴의사를 밝힌바 있는 이주영 해양수산부장관을 비롯, 정권출범 초부터 부처를 이끌어온 외교·통일·법무·농식품·산업·환경·국토부 장관들 가운데 업무역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일부 인사에 대한 교체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사실 청와대는 그동안 부인해 왔지만 정치권에서는 예산정국이 끝난 뒤 개각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게 제기돼 왔다. 박 대통령이 경제혁신 3개년 계획, 공무원연금 개혁 등의 국정과제 완수를 위해 집권 3년차를 맞아 국정동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내각을 일신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정부조직법 개정안 공포로 국민안전처와 인사혁신처가 국무총리실 산하로 신설되고, 총리를 중심으로 경제부총리와 사회부총리가 포진한 삼두체제로 내각이 재편된 것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 왔다.
박 대통령이 정책 전반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밑그림을 그린 내각의 삼두체제가 완성됨으로써 총리가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된 점을 고려할 때 총리 교체 등 중폭 이상의 개각이 단행될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경환 경제·황우여 사회부총리에 더해 정치권의 중량감 있는 인사를 총리로 발탁, 집권 3년차 ‘친박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의 발탁설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공무원연금개혁이 차질을 빚고 있는데다 야당의 사자방 (4대강, 자원외교 및 방산비리) 국정조사 공세가 거세지고 있다는 점 등이 걸림돌이 되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다선의 중진급으로 행정경험도 풍부한 인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주영 장관을 비롯해 이른바 ‘장수’ 장관들과 인사 대상에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금융위원회위원장을 비롯한 장관급 인사들도 교체대상에 포함될 경우 개각은 중폭이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개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당 안팎에서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개각시기도 예상보다 당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르면 이달 중하순께 개각이 전격 단행될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정윤회 파문, 도리어 개각 늦추게 됐다?
다만, 이처럼 국민적 의혹이 크고 야당의 공세가 거센 상황에서 청와대 비서진과 내각을 교체한다는 것은 자칫 모든 의혹을 시인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어 개각이 더 신중할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번 정윤회 파문이 도리어 연말이나 연초 예상됐던 개각을 더 미루는 계기가 됐다고 보고 있다. 비선 실세를 겨냥한 야권의 공세가 최고조에 달한데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국면전환용 개각은 도리어 화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권력 암투설과 내부 잡음 등 다른 정권에서는 임기 말 나타났던 현상이 불과 집권 2년차에 불거지고 있는데 섣부른 인사로 부실 검증 논란이 재연되면 조기 레임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도 정국전환이나 분위기 쇄신을 위한 ‘이벤트성 개각’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아 온 만큼 개각 카드로 이번 논란을 비껴가진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