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한미 FTA에 올인
노 대통령, 한미 FTA에 올인
  • 김윤재
  • 승인 2006.05.0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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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정 실패후 새로운 대안
“한미 FTA가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라는 반대파의 공격에 대해 정부 관계자들은 “ 2~3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왔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발표된 미국측 자료를 보면 한국이 2004년 초 미국에 먼저 한·미 FTA를 제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미 FTA는 미국이 시큰둥하는 바람에 1년 가까이 표류했다. 그 때문인지 그 즈음 노대통령의 동북아 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치된 청와대 동북아시대위원회나, 관련 보고서를 생산하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등에서 한미 FTA는 핵심 의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취임 초만 해도 ‘자주성’ ‘독자성’ ‘주도성’ 등을 강조하며 한국의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적극 설파하던 노대통령이 불과 몇 년 사이에 1백80도 돌변하자 기존 지지층에서부터 거센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IMF라는 경제 위기의 호된 충격을 경험한 중산층과 서민 사이에서는 또 한번 준비되지 않은 외부 충격이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지 않을까 잔뜩 걱정하는 분위기다. 왜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에 올인 이라는 강수를 뒀을까? ◆대연정 실패, 대안은...한미 FTA 노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카드를 꺼내들었다가 호된 역풍에 직면했다. 당시 노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갈등과 대립을 합리적으로 풀어나가는 의사 결정 구조나 정치적 시스템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라면서 그 예로 노사문제, 국민연금, 조세개혁, 교육 및 의료개방 등을 들었다.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팽팽하게 대립되어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던 이런 문제들을 풀어나가려면 정치적·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연정론은 야당은 물론 여당 내부로부터도 반발을 샀고, 노대통령은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며 3개월 만인 9월20일 논의 중단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보름이 채 안 된 10월2일 노대통령은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라는 책 한 권을 소개했다.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의 미래 생존 전략과 관련해 영감을 얻었다”라는 극찬을 곁들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열강의 각축전을 역사적으로 분석해, 앞으로 한국이 어떤 생존 전략을 써야 할지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의 결론은 이렇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노대통령은 직접 한·미 FTA 홍보대사 구실까지 하고 있다. 각종 회의나 행사에 참석해 한·미 FTA의 필요성을 역설하는가 하면, 3월23일 인터넷 언론과의 대화에서는 영화배우 이준기씨를 상대로 스크린 쿼터를 축소해도 되는 이유를 역설했다. 한·미 FTA가 급물살을 타게 된 데는 이처럼 노대통령의 ‘결심’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한미 FTA 졸속 추진? 정태인 전 국민경제비서관은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청와대와 정부 차원에서 한·미 FTA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김종훈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는 참여정부 초창기인 2003년 ‘FTA 추진 로드맵’을 짤 때부터 한미 FTA에 대한 전략적 검토를 병행해 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검토를 했을지는 몰라도 공개적으로 검토한 흔적이 부족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의 경우 한·일 FTA 관련 보고서가 25권인 데 반해 한·미 FTA 관련 보고서는 10여 권에 불과하다.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을 상대로 경제 협정을 체결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경제 효과와 관련된 전망이나 피해에 대한 준비가 미흡한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FTA 로드맵에 따르면 한·미 FTA는 3~4년 내 해결해야 할 중장기 과제에 속해 있었다. 이에 반해 일본·캐나다·아세안 국가들과의 FTA 체결은 1~2년 내에 해결할 단기 과제였다. FTA는 자국보다 기술력이 낮은 나라와 우선적으로 체결하는 것이 관례이다. 한국이 현재 FTA를 체결한 나라는 칠레와 싱가포르밖에 없다. 일본은 한국이 거대 선진 경제권 국가 중 최초로 협상을 시도한 상대였다. 한·일 FTA는 2004년 말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한·일 FTA가 이렇게 된 뒤로도 한동안 한·미 FTA는 거론되지 않았다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내부 관계자는 말했다. 그런데 지난 1월 초 갑자기 상부로부터 “한·미 FTA를 할 거니까 (구체적인 협상안을) 준비하라”라는 지시를 받고 어리둥절했다는 것이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또 국민경제자문회의나 대외경제위원회에도 지난해 상반기까지 한·미 FTA 추진 사실이 보고 된 바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종훈 대표는, 이들 기구가 의사 결정·집행 기관이 아닌 만큼 보고 대상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참여정부라면 한·미 FTA 같은 중대 사안에 대한 논의를 자문 기구에 알렸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것이 자문회의에 참여했던 한 민간 위원의 지적이다. ◆반발 기류 거세지자 ‘적극 대응’ 지시 “한국은 동북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이 비슷해지는 2020~2030년경에 통일을 이루고 아시아의 스위스, 동북아의 균형자로 거듭난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이 단독으로 동북아의 세력 균형자가 되기 힘들다. 따라서 그 때까지는 최대 패권국인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해 신뢰를 쌓고 실력을 기르는 일이 급선무다.” 대선 후보 시절 노대통령의 정책팀장을 맡았고, 청와대 국정과제팀장을 거쳐 국회의장 정책비서관을 지낸 배기찬씨가 쓴 이 책을 노대통령은 그 후로도 세 번이나 더 공식 석상에서 언급했다. 지난해 11월11일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출입기자들에게 이 책을 한 권씩 돌리며 “대통령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 책이 대통령의 정국 구상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배씨는 올 2월 동북아시대위원회 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지난해 10월 이후 노대통령의 정책 방향은 급격하게 ‘친미’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2005년 11월17일 노무현-부시 두 정상의 ‘경주 공동선언’이 상징적이다. 경주 공동선언은 △한·미 동맹 강화 △9·19 북핵 공동성명 이행 합의 추진 △한·미 경제협력 강화라는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이는 2006년 1월 반기문-라이스 간 주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2월 김현종-로브 포트먼 대표 간 한미 FTA 개시 선언으로 이어졌다. 외교·안보에 이어 경제 동맹을 선언한 한·미 FTA에 대해 노대통령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미국 시스템과 경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미꾸라지 통에 메기를 집어넣으면 미꾸라지가 안 잡아먹히려고 열심히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튼튼해진다”는 이른바 ‘메기론’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국회 논쟁도 서서히 가열되고 있다.논쟁을 촉발한 정태인 전 비서관은 정치권의 각종 모임에 강사로 불려다니느라 바쁘고, 지난 주 내내 대정부 질문 답변자로 나선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여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의원들의 ‘졸속’ 추궁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여권 내 차기 주자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자칫 재집권 기반마저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런 반발 기류에 대해 노대통령은 적극적인 대응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 참모는 “대통령은 당장의 유·불리보다 나라의 미래를 더 걱정하고 있다. 대통령의 판단을 믿어 달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비관적이다. 대연정 만큼이나 거칠게 튀어나온 한·미 FTA가 또다시 국론 분열의 불씨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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