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정유업계가 맞은 악재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유가 하락은 일회성 이벤트로 지나갈 수 있지만, 이익의 핵인 정제마진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관계자들은 정제마진 악화가 경영난을 지속시킬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정부가 기름값 하락을 압박하면서, 정유업계는 울상을 짓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전문가들은 정유업계가 꺼내들 수 있는 마지막 카드로 ‘구조조정’을 꼽았다.
국제유가가 곤두박질치면서 정유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실적 발표 시즌이 다가오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적자여부’는 이미 확실한 상황에 ‘적자규모’가 어느 정도 수준일지 조심스레 가늠해보고 있는 모양새다.
◆국제유가 곤두박질…정유업계 ‘울상’
15일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는 지난해 3분기까지 약 1조201억원의 정유부문 영업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여기에 4분기 이후 국제유가 폭락으로 수입원유 재고평가 손실이 크게 늘어나 지난해 연간 영업손실 규모는 2조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3분기 말까지의 실적을 살펴보면 업체별로 살펴보면 SK이노베이션이 4060억원, GS칼텍스가 4015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으며, 에쓰오일도 이와 비슷한 3918억원의 적자를 기록 중이다. 현대오일뱅크만이 1792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4분기 실적은 수입원유 가격의 폭락으로 영업손실 규모가 더 커질 전망이다. 국내 정유사 수입 원유의 70∼80%를 차지하는 중동산 두바이유는 9월말 배럴당 95.5달러에 거래됐지만 12월말 가격은 53.9달러, 지난 20일 기준으로 44.82달러였다. 4분기 석달새 유가는 배럴당 40달러 이상 떨어진 것.
현대증권이 집계한 업계 영업적자 규모는 SK이노베이션의 경우 3764억원, GS칼텍스는 2894억원, S-OIL은 2999억원이다. 연간으로 따지면 SK는 62조7818억원 매출을 올리면서 1375억원 적자를, GS칼텍스는 39조4715억 매출에 2934억원 적자, S-OIL은 28조1659억원 매출과 3457억원 적자를 본 것으로 추정됐다. 교보증권은 지난해 4·4분기 SK이노베이션과 S-OIL이 각각 2371억원, 1601억원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파악했다.
대·내외적 여건 역시 최악이다. 우선 대외적으로는 주요 석유제품 수출국인 중국이 90만배럴 수준의 정유시설 신증설 공사를 진행 중이며, 중동 역시 이라크와 이란, 쿠웨이트,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283만배럴 수준의 정유시설 공사를 하고 있다. 원유를 수입해 정제마진 만으로 버티는 국내 정유업체 입장에서는 양대 석유강국 사이에서 경쟁하는 자체가 힘겹다.
내부적으로는 각종 규제에 따른 수익성 악화가 예상되고 있다. 정유업계는 올해부터 석유화학제품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용 원유에 1%의 관세가 부과돼 매년 1100억원 안팎의 세금 부담을 추가로 받게 됐다. 또 바이오디젤 의무혼합비율 증가에 따른 구매 비용 부담, 탄소배출건 거래제 도입에 따른 비용 등을 합하면 수천억원의 추가 손실이 불가피하다.

◆이익의 ‘핵’ 정제마진이 위험하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정제마진이다. 국제유가가 안정을 찾더라도 재고평가손실 정도만 없어지는 수준에 그치지만, 악화된 정제마진은 앞으로 경영난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증권업계가 예측하는 정유 4사의 원유 재고손실은 2조원에 이른다. 다만 원유 재고손실은 국제 유가가 안정을 되찾으면 사라질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하다. 문제는 원유보다 더 많은 석유제품의 물동량 증가에 따른 정제마진 악화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정유사들의 수익성 지표인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은 2011년 10월 배럴당 10.29달러로 정점을 찍은 이후 2013년 10월 3.49달러까지 떨어졌다가 작년에는 4∼6달러로 반등했다.
1월 현재 6.36달러를 나타내고 있지만 손익분기점(BEP)으로 여겨지는 5달러선을 간신히 넘긴 상태다. 이는 정유사가 원유를 정제해 팔고 남긴 마진 6.36달러에서 기본운영비 등으로 지출되는 5달러를 빼면 겨우 1배럴에 1.36달러만 수익으로 남겼다는 의미다.
정제마진이란 최종 석유제품의 판매가격에서 원료인 원유 수입가격을 빼고 정유사들이 남긴 이익이다. 두바이유를 주 원료로 사용하는 아시아지역 정유사들은 두바이유가 주로 거래되는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을 수익성 지표로 삼는다.
업계의 의견 역시 “정제마진 개선이라는 국내 정유산업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실질적인 실적 개선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유산업의 위기는 유가급락과 상관없이 진행되는 상황”라며 “이미 2년전부터 원유를 정제설비에 넣는 순간부터 마이너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익성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고 말했다.
유가하락세가 진정되더라도 중동 및 중국의 정제설비 증설이 본격화되고, 석유제품 수출이 늘어나고 있어 이에 따라 저수익 구조가 이어질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간 국내 정유산업이 내수시장이 과잉인 상황에서 수출형으로 체질을 개선해 성과를 냈으나 중국의 자급률이 100%에 이르면서 수출지역도 막막해진 것이다.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대 석유제품 수출국인 러시아는 2010년 1분기 아시아에 일간 23만8000배럴의 석유 제품과 59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다. 하지만 작년 3분기에는 일간 53만 배럴의 석유제품과 124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다. 또 인도는 지난해 10월 152만 배럴의 제품을 수출해 아시아 최대 수출국인 우리나라를 역전했다.
LIG투자증권 박영훈 연구원은 “2005년 일간 400만 배럴의 정제 처리량을 보인 러시아의 최근 일간 정제처리량은 600만 배럴 수준으로 올라섰다”며 “더 큰 문제는 미국을 제외한 OECD 전체의 정제 가동률이 80% 미만이어서 물량 추가 공급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미 국내 정유업계의 수출물량은 선박 5척중 1척이 싱가포르 중계무역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고정 수출대상을 찾지 못해 싱가포르 시장에서 출혈경쟁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그간 적자와 흑자를 반복해오다 지금은 총체적 난국에 직면한 상황”이라며 “유가하락이 끝난다고 해도 정제마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답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 “기름값 내려라” 압박도 불만
이 같은 상황에, 정부가 국제 유가 하락에 따라 기름 값을 내리라고 업계를 압박하고 나섰다. 이에 정유업계는 정부의 요청대로 기름 값을 내리기 힘들다며 맞서고 있다. 이유는 유류세와 수익성 악화다.
11일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정유업계는 국제 유가 하락에 따른 제품가격 인하 요인을 국내 공급가격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며 “정부가 휘발유 가격 인하를 압박한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에너지기술평가원에서 국내 석유·액화천연가스(LPG) 유통업계 간담회를 개최하고 “국제 유가 인하에 따라 휘발유 등 석유제품 가격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산업부는 국제유가 하락이 소비 활성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체감할 정도로 가격 인하 폭이 충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국제유가가 반토막 났지만 국내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가격은 ℓ당 1887.37원에서 1591.98원으로 15.6% 내리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정유업계가 기름 값을 더 이상 내리기 힘들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은 유류세 비중이 높고, 국제유가 하락에 따라 업계의 수익성이 악화돼 가격 인하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서혜 석유시장감시단 팀장은 “정부가 유류세를 내리지 않는다면 휘발유 값 추가 인하가 힘들다”고 말했다. 김문식 주유소협회 회장도 “정부가 유류세를 인하하지 않으면 휘발유 가격이 1300원 이하로 떨어지기 힘들다”며 “정부가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혜택을 서민들에게 주려면, 유류세를 인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지난해 말 기준 정유사의 세전 휘발유 가격은 ℓ당 541.4원으로 연초에 비해 335.8원 낮아졌다. 같은 기간 국제 휘발유 가격 하락분(327.5원)보다 더 떨어진 것이다.
반면 주유소 휘발유의 평균 소비자 가격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월 초 49%에서 12월 말 기준 56%로 급증했다. 이 기간 세금은 전체 가격의 10%에 해당하는 부가가치세 변동에 따라 ℓ당 917.4원에서 890.9원으로 26.5원 내리는 데 그쳤다.
우리나라는 유가 등락에 상관없이 석유량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고정세율을 적용한다. 현재 휘발유에는 ℓ당 교통세 529원이 붙고, 교육세(교통세의 15%), 주행세(교통세의 26%)가 부과된다. 여기에 부가세(세후 가격의 10%)가 합해진다. 휘발유 값의 60% 정도가 세금인 것이다.
정유사의 한 관계자는 “올해도 상당 기간 저유가 국면이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해 정유업계는 비상”이라며 “그런데 정부는 업계의 고충을 헤아리지 않고, 대중 영합적 정책으로 기름 값 인하를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답은 구조조정?
이에 일부 전문가들은 향후 국제유가가 30달러 선까지 폭락할 수 있다며 저유가를 극복하기 위해 고강도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박종우 화학경제연구원 원장은 지난 16일 ‘화학 산업 위기진단 및 유망사업 발굴’ 세미나에서 “화학 산업은 국제유가가 향후 2년간 30달러 선이 유지되며 어려운 상황이 2~3년은 지속될 것”이라며 “결국 마지막 카드로 꺼낼 수 있는 것은 구조조정”이라고 밝혔다.
박 원장은 “OPEC(석유수출국기구)이 셰일가스 산업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 2년간 30달러 선의 국제유가를 유지할 것”이라면서 “최악의 상황에 20달러 선까지 내려앉을 것이고, 국내 화학사들은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내 화학사들은 연구개발에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하고 있지만, 효율성은 떨어진다”면서 “연구·개발(R&D) 분야를 외주로 주고, 노후한 플랜트를 폐쇄하는 등의 경영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시사포커스 / 정주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