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업계에서는 업계 1,2위를 다투는 넥슨과 엔씨가 협력 진영을 구축한 것에 대해 실상은 서로 ‘구밀복검’의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들을 하기도 했지만, 두 업체는 몇 년 간 끈끈한 협력을 과시하며 각종 오해들을 불식시켰다.
하지만 2012년 넥슨 김정주 회장이 엔씨소프트 김택진 사장의 개인 지분 14.7%를 8000억원에 사들인 것에 이어 지난해 10월 8일 엔씨소프트와 상의 없이 추가로 지분 0.4%를 사들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드디어 넥슨이 ‘경영 일원화’를 도모하고자 반기를 들었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하게 돌았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12조와 동법 시행령 제18조에 따르면 기업의 지분 15%를 초과 취득할 경우 해당 업체는 공정거래위원회에 관련 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넥슨은 이 신고서를 제출했다. 다만 당시 넥슨은 “단순 투자목적”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넥슨은 지난 27일 긴급 공시를 통해 엔씨소프트 보유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경영참여’로 바꾼다고 공포하며 경영전쟁에 불을 붙였다. 이에 엔씨소프트는 “신뢰를 무너뜨린 행동”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 넥슨, 음모론 있었나?
서울대 전자공학과 1년 선후배 사이로 알려진 넥슨 김정주 회장과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은 비슷한 시기에 게임시장에 뛰어든 ‘게임 산업 1세대’들이다. 20여년 가까이 같은 업계에 몸담으며 고충을 나눴을 두 대표는 최근 몇 년만에 중국 온라인 게임 업체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과 모바일 시장이 확장되고 있는 것에 대해 크게 우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두 업체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계에서 게임관련 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한 미국 게임업체 EA를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물밑작업에 열을 올렸다. EA를 인수하게 되면 회사가 보유한 특허를 이용, 중국 업체를 압박할 수 있고 다양한 게임을 변환해 모바일 플렛폼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쯤 넥슨은 ‘글로벌 게임업체 인수 및 경영’ 명목으로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의 개인지분 14.7%를 8000억원에 사들이며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고, 마침내 엔씨소프트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에 대해 두 업체는 향후 동등하게 EA 지분을 갖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EA 인수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12년 1월 김택진 사장은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된 게임전시회 ‘지스타’에서 “지분 매각 후 (현금을 확보해) 한국 게임산업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대형 인수합병을 넥슨과 함께 추진하려 했다”면서도 “8월을 목표로 잡았지만 뜻대로 안 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첫 협력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넥슨-엔씨소프트의 연합은 유효한 듯 보였다. 두 업체는 곧 공동 개발 프로젝트 ‘마비노기2’가 선보였다. 그러나 2014년 1월 마비노기2 공동 개발팀은 해체됐고 이어 3월 메이플스토리2 공동 개발 프로젝트마저 중단되면서 사실상 두 회사의 교류는 완전히 끊어졌다.
게임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8일 넥슨이 엔씨소프트와 상의 없이 추가로 회사 지분 0.4%를 사들이면서 경영권 전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넥슨의 지분율이 15%를 넘어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심사 신고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넥슨 측은 끝까지 “단순 투자 목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엔씨소프트 측은 “사전 논의가 전혀 없었던 만큼 단순 투자 목적이라는 공시 내용에 대해 계속 주시할 것”이라며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넥슨의 지분 매입과정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산재해있는 것도 사실이다. 먼저 2012년 넥슨이 최초로 엔씨소프트의 지분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그 주체는 일본법인이었다.
그러나 추가로 지분 0.4% 취득한 곳은 한국법인인 비상장기업 넥슨코리아다. 일본 증시에 상장된 넥슨 일본법인이 주식을 매입했다면 곧바로 주식의 출처가 드러나지만, 국내 비상장기업의 경우 누가 주체인지 파악하는데 시간이 소모된다. 즉 엔씨소프트가 지분매입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꼼수’를 썼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김택진 대표조차 관련 내용에 대해 사전에 들은 바가 없다. 넥슨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일로 엔씨소프트와 넥슨의 협력 관계에 큰 균열이 발생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M&A공룡으로 불리는 넥슨의 이력을 토대로 했을 때, 엔씨소프트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라며 “국내 게임업체들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넥슨이 엔씨소프트를 흔드는 것이 과연 어떤 이득이 되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 김택진 부인 윤송이, 경영권 방어위한 포석?
은밀하게 진행된 넥슨의 주식거래에 양측의 협력 관계에 금이 갔고,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느냐 마느냐를 두고 양측의 줄다리기가 팽팽했다.
업계에 따르면 넥슨은 당초 지난 22일 경영 참여 공시를 내려 했으나 김택진 사장이 대화로 풀 것을 제의해 공시를 미뤘다. 이에 양측은 주말 내내 경영협력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엔씨소프트가 돌연 23일 넥슨과 상의 없이 김택진 사장의 부인인 윤송이 북미 총괄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켰고, 이에 27일 넥슨이 독자 경영을 통보하면서 양측 협상은 완전히 결렬됐다.
윤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된 것과 관련해 넥슨은 “엔씨소프트가 김택진 대표의 경영권을 강화해 넥슨의 경영 참여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주장했다.
윤 사장은 그동안 글로벌최고전략책임자 겸 북미 유럽 법인 대표로써 해외 사업을 이끌어왔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윤 사장의 승진은 이미 예고돼 있었다”며 “윤 사장은 만성적인 적자에 빠진 엔씨소프트 북미 법인에서 ‘길드워2’를 성공시키며 1000억원 가량의 누적 현금을 쌓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넥슨 관계자는 “사장을 포함한 임원 인사에 대해 최대주주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이에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윤 사장의 지분은 스톡옵션을 합쳐도 1%도 안 되고 정기 임원 인사를 최대주주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다”고 반박했다.
◆ 국민연금, 누구 편에 서나
넥슨-엔씨소프트의 신경전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가운데 엔씨소프트의 3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향후 경영권의 향방이 결정돼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현재 김택진 사장이 보유 중인 엔씨소프트 지분은 9.9%로 넥슨 지분율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하지만 엔씨소프트 지분 7.89%를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이 김택진 사장 측에 설 경우 판도는 바뀐다. 김택진 사장과 국민연금의 지분을 합치면 총 17.8%로 넥슨으로부터 경영권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업 관계자는 “김택진 사장 지분에 자사주 8.93%를 합치면 엔씨소프트의 지분이 넥슨보다 많기 때문에 넥슨으로서는 추가 지분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며 “넥슨의 현금 보유량으로 봤을 때 추가 지분 인수에 무리가 없지만 추가 매입 보다는 우호 지분 확보 경쟁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다른 증권업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당장 어느 한 쪽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가능성은 낮다”며 “국민연금 외에 다른 금융사나 외국계 자금 등을 대상으로 우호지분 확보를 위한 경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외국계 펀드의 경우 엔씨소프트와 넥슨의 지분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곳이 많은데, 이들은 장기적 성장 가능성 보다는 단기 수익을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에 넥슨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진 상황이다.

◆ 넥슨-엔씨, 찢어지나 봉합되나
한편, 국내 게임업계의 경우 넥슨-엔씨소프트의 경영권 싸움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번 경영권 분쟁의 근본적인 이유로 꼽히는 것 중 하나가 국내 게임 산업 침체기 때문이다.
국내 온라인 게임업계는 수년째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2012년 9조7525억원이었던 국내 시장 규모가 2013년 들어 9조7198억원으로 소폭 감소하면서 첫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 인터넷 메신저업체 텐센트는 국내 게임업체에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했다. 2011년 텐센트가 투자한 미국 게임개발사 라이엇게임즈의 ‘리그오브레전드(LoL)’는 국내 PC방 게임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이외 카카오톡, CJ게임즈, 모바일 게임업체 네시삼십삼분의 주요 주주도 텐센트다.
엔씨소프트와 넥슨 연합군이 3년째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대한민국 게임업계 전체가 새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국내 게임업계에 암울한 전조다. 이에 일각에서는 넥슨 김정주 회장이 ‘선배 뒷통수 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엔씨소프트 경영권을 장악해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현 상황에서 넥슨은 경영 참여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이후 엔씨소프트 임원의 선임‧해임, 직무 정지, 정관·자본금 변경 등을 간섭할 수 있고 회사의 중요 자산 일부나 전부를 양도·양수할 수 있다. 또한 합병, 분할, 회사 청산도 가능하게 된다.
넥슨이 경영전쟁을 선포한 것에 대해 경고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넥슨 김정주 회장과 엔씨소프트 김택진 사장은 평소 막역한 관계로 알려졌고 지난 2012년 엔씨소프트가 주식을 매각할 때도 김택진 사장은 넥슨에 시가 27만원대 보다 낮은 25만원에 넘기기도 했다.
이에 이번 넥슨의 선전포고가 ‘제 살 깎아먹기’가 될지, 국내 게임업계에 새 바람을 불러올 ‘특약처방’이 될지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시사포커스 / 진민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