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 독제체제를 이어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됐던 긴급조치 9호 행사와 관련해 대법원이 불법이 아니었다고 판결해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26일, 1978년 6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20일간 구금됐던 최 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하급심에 돌려보냈다.
앞서 항소심에서는 “국가는 최 씨에게 200만원을 배상하라”며 일부 승소 판결했었지만, 대법원이 이날 원심을 깬 것이다.
특히, 대법원은 판결에서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 행위 자체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긴급조치 9호가 사후적으로 위헌-무효 선언됐다 하더라도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대통령은 원칙적으로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므로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해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이 수사권이 없음에도 최씨를 체포-구금한 것은 불법행위로 볼 수 있다”면서도 “최씨가 체포-구금 이후 소송을 내기까지 30년 이상이 지난 점 등을 고려하면 최씨에게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소멸시효의 문제도 덧붙였다.
한편, 대법원의 이 같은 판결에 야당은 “반역사적 판결”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성수 대변인은 27일 오전 현안브리핑에서 “유신 시절의 긴급 조치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대법원이 이 긴급 조치를 발동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며 이 같이 비난했다.
김 대변인은 “한마디로 유신체제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앞뒤 안 맞는 논리를 억지로 동원한 것”이라며 “대법원은 지난 2013년 전원 합의체 판결로 이 긴급 조치가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의 과실을 인정한 2심 판결을 뒤집고 긴급조치 발동이 유신헌법에 근거한 이른바 통치행위로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긴급 조치 조항은 위헌인데 그 긴급 조치를 발동한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니 억지 논리라 아니 할 수 없다”며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위해 만든 게 유신 헌법이고 그 헌법에 근거해 긴급 조치를 발동한 사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이어, “이런 논리라면 독재자가 위헌적인 법을 만들고 그 법에 근거해 아무리 국민들을 탄압해도 사후에 아무런 책임도 물을 수 없고 피해 배상도 받을 수 없게 된다”면서 “유신의 품에 안긴 대법원이라고 한 민변의 통렬한 비판을 대법원은 진정 부끄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또, “대법원은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이후 과거사와 시국사건에 관련된 판결에서 역사적인 퇴행을 거듭하고 있고 노동자 권익보다는 경영자 쪽을 중시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대법원이 지나치게 보수화되고 있다는 우려를 넘어 이제는 과연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책무를 감당할 수 있겠는 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법원의 자성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도 26일 논평을 내고 “대법원이 또 다시 정의를 외면하고 유신의 품에 안겼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민변은 “이번 판결은 일개 부에서 종래 전원합의체 판결 및 헌법재판소 결정, 그리고 형사재심 판결의 취지를 뒤집은 채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라며 “대법원은, 40년 전 대법원과 마찬가지로 헌법이 부여한 국민의 기본권보장과 법치주의를 수호할 책무를 포기하고 긴급조치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다”고 맹비난했다.
민변은 이어, “유신정권, 특히 박정희의 긴급조치 발동행위에 대하여 ‘알아서’, ‘서둘러서’ ‘졸속으로’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며 “결국 이번 판결은 유신헌법 및 긴급조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고도의 정치적 판결’에 다름 아니다”고 분개했다.
민변은 그러면서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현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유신 부활 내지 정당화의 기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고 한다면, 사법심사를 배제하고 국민을 영장 없이 체포하고, 이유 없이 감옥에 넣고 생명을 앗아가도 된단 말인가. 과연 대법원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할 자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거듭 강하게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