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미 의회 연설에서 또 다시 궤변을 서슴지 않았다. 더욱이 과거사에 대한 사죄는 결국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일 관계의 악화는 물론, 한국 정부의 외교력 부재 문제에 대한 비판도 더욱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우리 일본은 지난 전쟁(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의 마음으로 전후를 시작했다”며 “우리의 행위가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역대 총리들에 의해 표현된 관점들을 계승하겠다”고 연설했다.
◆ 아베, ‘위안부 사과’ 끝내 외면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29일 미 하원 본회의장에서 개최된 ‘희망의 동맹으로'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 발언은 일본 총리로서는 최초로 실시한 미 상·하원 합동연설이기도 하다.
아베 신조 총리는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해 “아시아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고도 언급했다. 이러한 표현은 아베 신조로서는 무척 이례적인 내용으로 대·내외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신조 총리는 역대 담화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표현인 ‘식민지배와 침략’ 등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나 분명한 사죄의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아, ‘혹시나’하고 기대한 한국을 크게 실망시키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베 신조 총리의 연설을 두고 그동안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요구해온 한국 및 중국 등 주변국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비판적 평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아베 총리는 한국이 사죄 등을 요구해온 위안부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인간 안보’를 거론하는 대목에서 “무력 분쟁은 항상 여성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며 “우리 시대에, 결국 여성들이 인권 학대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연설하는 데 그쳤다.
아베 신조 총리는 과거 제국주의 전쟁 및 식민지 침략 때문에 쉽게 지워버리기 힘든 엄청난 피해를 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에 대한 사죄에는 다분히 인색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아베 신조 총리는 과거에 일본이 벌였던 태평양전쟁 및 이로 인해 희생된 미국인에 대해서는 강도 높은 용어로 반성하는 내용을 강조하는 등, 다분히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 韓 외교실패론 솔솔

아베 신조 총리가 다분히 이중적인 태도로 연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의원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호의적인 분위기는 형성되고 있지 않다.
특히 미국 민주당 의원들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은 것을 두고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2007년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을 주도한 바 있는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은 물론, 하원 외교위 민주당 간사인 엘리엇 엥겔 의원까지 적극 나서 ‘핵심’이 빠진 아베 총리의 연설을 비판하는 등 하원의 기류가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다.
한편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에 앞서서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을 비롯한 미 여·야 의원 25명은 “아베 총리는 역사를 직시하고 과거사 사과를 촉구하라”는 내용의 연판장에 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일부 미 의원들의 반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과 일본이 새로운 ‘밀월 관계’를 맺어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 및 외교력에 대해서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아베 총리는 표면상으로 한국, 중국과도 협력관계 구축을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이렇게 급격히 요동치고 있는 가운데, 한국만 외교적 고립 상태에 빠져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계와 외교계를 중심으로 “미국·중국·일본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날렵하게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는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야권은 “특히 청와대의 대·내외 인식 능력이 한계에 부딪친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 한편, 여당 일부에서도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각국 정상이 발 빠르게 만나고 있지만, 올해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중국·일본 정상 중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상황이다.
최근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반둥회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 총리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남미 순방을 이유로 불참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남미 순방 일정은 오래 전부터 잡혀 있었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은 부득이하게 불참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올해 60주년을 맞이하는 반둥회의 일정이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된 바 있어 이 같은 해명이 석연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박 대통령이 불참한 반둥회의에서 아베 총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양국 관계가 개선되고 있다고 평가한다”며 양국 우호를 드러내놓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반둥회의에서 만난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에도 참여할 것을 시사했다.이런 극적 장면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패권을 위해 일본이 절실하게 필요한 중국과, 경제성장 및 수출 증대가 당면 과제인 일본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진 결과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일치로 인해, 그동안 역사 및 영토문제로 극한적인 대립을 거듭하던 중국과 일본이 예기치 않은 화해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잇따른다.
◆ “외교적 고립은 사실 무근”
정계 및 외교가를 중심으로 “한국은 원칙론만 고수하다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장기적인 외교안보 전략을 마련하지 않은 채 사안 대처하는 데만 급급하다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심지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을 비판하면 미국과 중국이 적극 편을 들어줄 것”이라며 “다분히 수동적인 외교 발상이 횡횡하고 있다”는 비난까지 널리 퍼져나가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특히 정계 및 외교계 일각에서는 “중국이 역사와 경제를 분리해 일본과 실리를 취하려는 외교 전략적 가능성에 대해 그동안 우리 정부의 인식이 너무 안이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정부 및 청와대의 수동적 외교 자세에 대해 야권에서는 강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일본의 군사적 역할이 확대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이 개정된 것을 두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청와대 및 정부의 무능함을 질타하고 나섰다.
지난 29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전병헌 최고위원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러의 균형 체제가 지각변동 수준으로 요동치고 있는데 우리 외교는 도무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 외교의 장기간 실종사태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이어 전 최고위원은 “우리 외교의 실종 기간이 너무 길다. 존재감이 없는 무능 외교는 봐줄 수 없다”며 “이제 외교안보팀을 교체할 때가 됐다. 더 이상 이런 무능한 외교안보팀을 방치한다면 국가적 재난이 준비될 뿐”이라고 개탄했다.
추미애 최고위원 역시 “우리 정부는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 어떤 경우도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개입하지 못한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이는 국민을 상대로 잘못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개정된 지침에는 '해당국의 주권을 존중한다'고 했을 뿐 해당국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표현은 없다”고 지적했다.
새정치연합 유은혜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을 열고 “무능한 정부 탓에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 허용되고, 특히 우리나라가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을 막을 명분과 방법이 사라졌다”며 “명백한 외교실패·안보실패”라고 비판했다.
유은혜 대변인은 “일본이 한반도 주변에서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경우 한국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이 개정안에 명시화하겠다고 주장해온 것이 박근혜 정부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유 대변인은 “이번에 이루어진 지침 개정에 우리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했으며 어떤 결과를 얻어냈는지 답해야 한다”며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무대책, 무책임 외교안보라인에 대한 전면적인 재편을 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 대해 우리 정부는 “외교적 고립은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일, 중·일 관계와 한·미, 한·중 관계는 ‘제로섬 게임’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주된 근거로 들고 있다.
한편 박 대통령은 오는 6월로 예정된 방미 일정을 앞두고 있지만 아베 총리 방미 이후로 상당한 압박이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가 방미 일정엣 안보, 경제 분야 등에서 미일 관계를 한층 끌어올린 만큼 박 대통령 역시 이에 못지않은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부담에 직면해있다. 여기서 자칫 미국과의 획기적 관계 구축에 실패하면, 미국·일본 간의 밀월 관계가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오는 9월에 개최되는 중국 전승기념일 참석 여부도 우리 정부의 외교력의 중대한 시험대로 남아있다. 중국은 박근혜 대통령·김정은 제1위원장·아베 신조 총리 등에게 모두 초청장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중국 전승기념일 참석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 짓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이 중국 전승기념일에 참석하게 되면 한국·미국·중국·일본·러시아·북한 등 한반도 주변 6개국 정상이 자연스럽게 양자 및 다자회담을 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를 통해 외교적 고립의 위험에 놓인 상태에서 극적 탈출에 성공할 수 있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러시아의 전승행사를 불참하기로 확정했다는 점이다. 만약 러시아 행사에는 불참하고 중국 행사에만 참석한다면 러시아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우려도 나온다. [시사포커스 / 문충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