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 부는 女風은 그칠 줄 모르고 있다. 각 정당을 막론하고 정부 내각에까지 女風은 신선하다 못해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분위기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처음 당 대표에 취임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정치권에 女風이 이정도로 확산될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류를 타고 여성들이 정치계의 지도부에 입성했지만, 뚜렷하게 입지를 마련한 인물 또한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커다랗게 남는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를 제외한 어느 누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겠는가. 한명숙 총리도 그렇고, 지방선거에서 완패를 당한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한나라당 김영선 임시 당의장, 민주당 장상 공동대표까지 모두가 그렇다. 女風이 불어 닥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상 살펴본 女風은 허풍에 가까워 보인다. 여성이 정치권의 ‘얼굴마담’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총리, 강한 모습 보여야
기자는 지난 15일 인터넷 시사포커스를 통해 한명숙 총리에 대한 ‘親盧 내각의 길들이기인가? 불신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며 한 총리의 미숙한 국정 업무 수행 능력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 바 있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한 총리가 헌정사상 첫 여성총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유럽 4개국 순방길에서 보였던 일련의 사고들이나 한 총리 회의 주재 시 장관급 인사들의 대거 불참 등. 다소 카리스마가 부족한 듯한 모습을 원인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였다.
물론, 親盧 내각이 한 총리를 길들이기 위함이라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총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 모든 것들이 한 총리 자신에게나 여성계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개인적으로 ‘모기만한 목소리를 내는 총리’라는 오명은 물론, 여성계 또한 실속 없는 ‘헌정사상 첫’이라는 타이틀에 기운이 빠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여성계 인사는 “한 총리에게 기대했던 바가 컸지만, 그 기대가 무엇인지 막연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한 사람이 총리가 됐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기란 무리다”는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총리의 모든 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성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것만으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목소리들도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여성계의 한 원로는 노무현 대통령과 비교를 하며 한 총리에 대해 “한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그렇더라도 한 총리는 가능성을 보여준 인물이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일도 아니다. 한 총리에게 여성계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하기보다는 그 이후 점차 많은 여성들이 한 총리 이상의 자리에서도 역할을 남성들과 동등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의미를 새겼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업무를 수행하고, 어디만큼의 자리까지 올라 있느냐가 아니다. 자칫 한 총리가 대한민국 여성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서,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정치판에 물들어 후배 여성 정치인들의 앞을 가로막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세간에 부풀려진 女風의 핵으로 부상하여 정부의 ‘얼굴마담’ 식으로 전락하는 일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총리가 보다 강한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한 총리 이후로 내각의 기강이 풀어졌다”느니, “여자라서 너무 약하다”는 등의 발언들을 묵살시키는 일이 한 총리에게는 가장 시급한 숙제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한 총리뿐 아닌, 여성계의 미래를 밝게 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김영선 한나라당 임시 당 대표
◈김영선 바람은 대외용?
그래도 한나라당의 女風은 확실히 믿을만하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다’보다는 ‘했다’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퇴임을 했기 때문이다. 정계뿐 아니라 정계 외에서도 박 전 대표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렇기에 서로 적이었던 상대 당 지도부들조차도 퇴임하는 박 전 대표에게 박수를 보내는가 하면,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진정한 女風의 근원지는 박 전 대표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박 전 대표가 비운 자리에 오른 김영선 임시 당 대표는 너무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연륜으로 보나, 정치 경력으로 보나 박 전 대표에 비할 바는 못 되어 보인다. 박 전 대표에 이어 두 번째 여성 당 대표가 되기는 하였지만, 그의 역할은 사실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힘들다. 우선 다른 이유들을 모두 접고서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김 대표는 선출직이 아닌, 임시직이기 때문이다.
물론, 짧은 시간 동안 다부진 모습을 보여 당내에서 확실한 눈도장을 찍어둔다면 차기나 차차기에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현재로써는 그 역할이 제대로 된 대표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김 대표 역시 한나라당이 암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女風 부풀리기의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결국 한나라당의 실세는 당 대표가 아닌, 원내대표에게 주어져 있는 형상이다. 더욱이 이재오 원내대표가 7.11 전당대회에서 당권도전 의사를 밝히며 그 세를 확장하는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역으로 김 대표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당 내외에서 “24일 당 대표인데 저렇게 열심히 할줄 몰랐다”는 김 대표에 대한 평가는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김 대표에 대해 큰 기대가 없었다는 뜻이다.
현재 김 대표는 짧지만, 그동안이라도 “발로 뛰는 한나라당,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한나라당의 임무를 충실히 하겠다”는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처럼 열과 성을 다하는 김 대표를 보면서도 당내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중진 의원의 경우 “김 대표가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당내 절차를 무시한 채 일정을 추진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며 “열정은 좋지만 너무 지나친 것은 좋지 않다”고 경계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다.
한나라당 역시 女風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내부에서는 박 대표 이후 여성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그에 더해 여성의 역할이 커지는 것마저 경계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읽혀지고 있다. 물론, 정략적인 이유이기 때문에 무조건 ‘여성이어서’ 경계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한나라당은 분명 대내적인 김 대표의 위상과 대외적인 김 대표의 위상을 달리 하고 있는 모습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내에서보다는 대외적으로 그 위상이 높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장상 민주당 공동대표
◈이미지 정치의 표본, 장상
심하게 표현해서 정치권에도 ‘얼굴마담’은 존재한다. 한나라당 박 전 대표가 몰고 온 女風은 정치권에 하나의 트랜드로 자리를 잡았고, 각 정당뿐 아니라 정부 주요 부처에서도 너나할 것 없이 여성계 인사를 영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민주당 장상 공동대표의 경우 그런 이미지 정치의 표상이라고 할만하다. 민주당은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부활의 가능성을 점친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상 공동대표의 영입은 민주당의 확실한 이미지 혁신, 또는 세 넓히기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장 대표의 경우 그동안 여성계와 시민단체들 사이에서 높은 지지를 얻어 온 인물이기에 민주당의 이미지 혁신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정체성도 명목도 불분명한 영입이기에 ‘얼굴마담’이라는 불명예를 얻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정당 사상 최초의 남녀 공동대표제”라는 타이틀을 내걸며 정당성, 참신성을 주장하고 있다. 지방선거의 여세를 몰아 대선까지 확실한 기틀을 다져놓겠다는 각오이다.
장 대표가 공동대표라고는 하지만, 실세는 역시 한화갑 대표가 쥐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민주당의 권한행사와 관련해서 한화갑, 장상 두 대표가 공동으로 당을 대표해 권한을 행사하되 다만, 법률적 권한은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선출된 당 대표(한화갑 대표)가 갖도록 하며 공동대표제는 한시적으로 내년 2월에 있을 정기 전당대회 때까지만 적용하는 것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장 대표는 민주당에 힘이 되어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당 대표라는 명예 외에는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장 대표가 원해서 공동대표직을 수락했겠지만, 결국 형상은 민주당의 ‘얼굴마담’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정치권에 불고 있는 女風의 허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유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풍기 바람으로는 안 돼
앞서 거론한 인물들이 비판 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정략적인 차원에서 여성을 이용하려고 하는 정치권의 현실이 비판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렇기에 현재 정치권에서 불고 있는 女風은 진정한 女風이라기보다는 당리당략에 의한 부풀리기 식 바람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부분의 언론이나 여론은 모두가 하나같이 정치권에서 불고 있는 여성의 바람에 대해 높게 평가를 하고 있지만, 실상 내막은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여성의 권익 상승을 위한 출발은 이제 첫 걸음을 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정치권 밖에서 여성 정치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김정숙 이사장은 22일 본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현재 정치권에서 불고 있는 女風에 대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고 평가했다.
김 이사장은 앞서 거론한 여성 인사들에 대해 “고위층에 여성들이 자력으로 들어가기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고 하며 “이렇게라도 여성들이 입지를 마련하게 된 것은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00%의 긍정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것은 “여성 인사들이 정부 고위층이나 정당 지도부에 입성하게 된 계기가 정당하지 않다”는 주장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들 모두는 선출직으로 직위를 얻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남성들과 정당한 경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 이사장은 “여성계가 들떠 있을 필요가 없다”며 “실현단계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김영선 대표에 대해서는 “24일짜리 당 대표직을 남성들이 안하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김 대표가 하게 된 것이 아니냐”고 하며 “여성들이 많이 당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지도부에 들어가 길을 닦아 놓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 김 이사장은 “언론과 시민, 여성계가 협조를 해서 여성 정치인들이 더 많은 곳에서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진정한 女風을 위해서는 우선 법과 제도로 여성 할당제를 명확히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고위층의 소수 몇몇 여성 인사들을 바탕으로 女風이 분다는 것은 심하게 과장된 표현이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에 진정한 女風이 불기 위해서는 풀뿌리 정치에서부터 여성 인사들의 자리가 늘어나야 할 것이다. 선풍기 바람이 아닌, 자연의 바람이 불어와 정치권이 신선해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