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할 말은 하는 사람 노웅래
클릭! 할 말은 하는 사람 노웅래
  • 김부삼
  • 승인 2006.07.0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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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편안한 삶을 거부한다
“20년 가까이 원칙을 갖고 올곧게 기자생활을 한 경험을 살려 ,전국 20개 MBC 단일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낡은 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뿌리내리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정치인 노웅래가 세상을 향해 약속한 첫 마디다. 올초 열린우리당의 새 원내대표 취임과 함께 원내부대표 단이 꾸려지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인물이 있다. 전임이었던 오영식 의원이 다소 저돌적이었다면 노웅래 공보부대표는 기자출신답게 뛰어난 상황 판단력과 정확한 워딩으로 언론인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다. ◆할 말은 하는 사람 노웅래 17대 국회에 입성하면서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다고 공언한 노 부대표는“깨끗한 정치가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고비용 저효율 정치구조를 깨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노 부대표는“더 이상 정치가 권력이나 특권이 아니라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공공서비스로 자리매김 돼야 한다”고 주장을 확고히 하고 있는 것. 과거 특권에 대한 비판기능과 권력에 한없이 부딪치며 사회 어두운 부분을 조명했던 그는 이제 그 특권 속에서 틀을 깨기 위해 힘쓰고 있다. 노 부대표는“과거 정치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전부였고 때문에 정치는 실생활과 무관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지금은 정치가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로 패러다임이 전환돼야 한다”며 “실생활과 연계된 ,밀착된 정치, 우리의 삶이 녹아드는 정치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기치를 세웠다. 2003년 MBC재직시절 20개 단일노조 MBC 노동조합위원장 겸 서울지부 위원장을 하면서 언론의 권력성과 특권에 맞서왔던 그는 “사회,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는 정치, 국익과 민생을 도외시하고 정파적 이익과 개인의 이해관계만 챙기는 정치 바꿔야 한다”며 “이를 위해 구시대적인 낡은 정치 청산해야 합니다. 국민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 정치, 개인 잇속에만 눈이먼 부패정치, 국민을 편가름 는 지역주의 정치, 변절과 배신이 판치는 철새 기회주의 정치,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실 연고주의 정치는 뿌리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자신의 홈페이지와 남긴 글이나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는 낡은 정치 청산은 노웅래=구시대 정치 청산이라는 등식을 성립해 놓았다. 노 부대표는“이제 국민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국민을 안심하게 할 수 있는 정치, 예측 가능한 정치, 국민 누구나 땀 흘린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정치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MBC기자로 비판의 입장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노웅래 의원의 걸어온 길과 열린우리당 내 공보부대표로서의 노웅래의 활약이 주목받는 이유다. ◆야당 정치인의 아들로 세상과 싸울 힘을 얻기까지 청년 노웅래가 기자를 꿈꾼 것은 전두환 정권의 출범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부친의 좌절과 절망, 또 총칼에 눌려 현실을 왜곡하는 언론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노 부대표는 어릴 적 한때 가톨릭 신부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웃에게 봉사하며 사는 삶을 꿈꿔왔던 것이다. 노 부대표가 언론계로 진출하겠다고 뜻을 굳힌 것은 대학교 3학년 때. 기자가 되어 사회 정의를 세우고 사회 비리와 부정을 비판하고 견제함으로써 바른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중앙대 철학과 4년 노 부대표는 처음 치른 언론사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악질’ 야당정치인의 아들이란 이유로 면접장에서도 내몰렸던 형의 경험 때문에 붙을 수 있을 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앙언론사에 입사한 다는 것은 인맥과 지연, 학연에 따라 좌주우지 하던 것이었고 당시 노 부대표에게는 야당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노 부대표가 태어날 당시 그의 부친(노승환)은 스물아홉의 나이에 서울시 마포구 제 4선거구에서 당선돼 초대 서울시의회 의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이후 동장선거에 당선된 부친은 국회에 입성, 5선을 지냈다.
1988년부터 2년간 국회부의장을 지낸 부친은 부활한 지방자치제 하에서 구청장을 두번 역임하는 등 야당정치인으로 이름이 알려진 상황. 80년대 초 1사 1도 체제의 군사정권 하에서 야당정치인의 아들이 중앙언론사에 입사하기란 여간 힘들었을 것이다. 칼날을 다시 세우고 언론사 입사 준비로 밤을 낮같이 새우길 수년째. 노 부대표는 1983년 9월, ‘매일경제신문사’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노 부대표는 2년간 매일경제신문에서 일하다가 1985년 다시 MBC 보도국 기자로 새 출발했다. 노 부대표가 MBC에 입사할 당시 부친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해인 1985년 12월. 당시 노 부대표는 전국일간지인 서울의 모 신문사와 MBC 두 곳의 입사시험을 함께 쳤지만 신문사에 떨어졌다. 당시 신문사의 모 간부는 노 부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1500명의 지원자 중 2등으로 시험을 통과했지만 부친의 성향 때문에 합격을 꺼려한다”며 “여당의 실세 정치인에게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이에 노 부대표는 MBC로 향했고 이어 그가 언론 개혁 투쟁 일선에서는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MBC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신분보장’ 요구가 없었고, 무사히 최종면접까지 통과해 합격할 수 있었다고 노 부대표는 밝혔다. ◆편안한 삶을 거부한 기자생활 누구든지 편하고 쾌적하고 즐거운 길을 가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기자 노웅래는 달랐다. 아마도 부친이 살아온 삶의 과정이 알게 모르게 내면에 녹아들어 있었던 것. 2001년 기자 노웅래는 MBC 제4기 전국노조위원장 후보로 지명되며 전국 지부를 돌면서 현안과 앞으로의 비전을 설명했다. 그 결과 93%의 지지로 노조위원장에 당선된다. 2001년 MBC 전국노조위원장으로 취임한 날 '영원한 논객' 김중배 선생도 MBC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고 둘은 나란히 저녁 9시 뉴스를 장식했다. 그러나 편안한 삶도 잠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MBC 노조위원장 및 전국언론노동조합 부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노 부대표는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 디지털 TV 전송 방식 변경 투쟁을 벌였다. 2년 내내 YMCA 등 사회시민단체와 연대해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앞에서 100회 가까운 집회와 서명운동을 주도했고, 2002년 내내 ‘1인 항의 시위’를 전개하면서 관계자들의 의견을 해당 정부부처에 전달하는 한편, 시민들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노 부대표가 방송위원회 및 정부와 싸운 이유는 한가지. 이 문제가 국민의 '제대로 볼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시정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노 부대표가 2년 동안 노조를 이끌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노동조합이 힘을 가지려면 대의와 명분을 원칙으로 구성원의 자발적인 단결과 연대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또 노조 집행부는 ‘권력화’나 ‘귀족화’의 위험을 항상 경계해야 했고 회사 경영진과 중요한 문제를 논하다 보면, 자신이 마치 회사 경영진급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때문에 노 부대표는 “현명한 집행부는 자신의 역할이 구성원을 대표해 회사 경영진을 상대하는 것일 뿐, 자신은 개인적으로 사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인식해야한다”고 충언하고 있다. 노 부대표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인생역정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자신의 본분을 훼절할 수 있다”며 “진정한 노조인은 구성원들의 안녕. 복지 도모라는 본분에만 충실하기 위해 항상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노 부대표가 MBC노조를 맡으면서 고민한 것은 급변하는 방송 환경 속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올바른 대안을 수립하는 일.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능동적으로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리더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다양한 전파매체의 등장과 이로 인한 새 경쟁체제 속에서 구성원들이 마음 편하게 본업에 매진하도록 격려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와 신뢰가 쌓였고 지금의 MBC 노조는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강성노조가 됐다. 그가 MBC 전국노동조합 제4기 위원장으로서 MBC 노조를 이끄는 기본 방향으로 삼았던 것은 노조의 창립정신대로 대의와 원칙에 따라 ‘순수 노조 정신’으로 모든 활동에 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취임 첫마디로 “공정방송 쟁취에 앞장서겠다”고 천명했고 언론이 공정방송의 역할을 다 할 때, 사회의 목탁이자 비판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때만이 사회가 발전하고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아직 믿고 있다. ◆정치인 노웅래의 마포사랑
“20년 가까이 원칙을 갖고 올곧게 기자생활을 한 경험을 살려 ,전국 20개 MBC 단일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낡은 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뿌리내리는데 앞장서겠습니다”.정치인 노웅래가 세상을 향해 약속한 첫 마디다. 같은 언론인 출신인 한나라당 신영섭 후보와의 접전 끝에 당선된 노웅래 부대표는 "공약이었던 국민소환제를 적극 추진, 책임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5월 국민소환제는 진통끝에 국회의를 통과했고 노 부대표는 그의 공약을 이룬 셈이다.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노웅래 의원 사무실. 20여평 남짓한 그곳에는 매일 같이 민원인들이 오가며 가진 민원들을 호소하고 있다. 마포지기 4대째. 그에게 있어 마포구민들은 자신에게 한표를 던진 유권자를 넘어서 이웃이자 동료, 일가친척과 다름없다. 국회의원 당선 때 그는 “마포구민 전체와 저를 도와주신 분들의 것이다. 깨끗한 정치를 하라는 주민과 국민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깨끗한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공언했다. 생활정치론을 내세운 그는 “365일 발로 뛰는 생활정치, 현장정치를 하겠다. 정치가 생활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생활정치를 구현하겠다”며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낡은 정치를 심판하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는 2000년 당시 '정치개혁'을 목표로 민주당 내 의원모임으로 열린우리당 창당에 주도적 역할을 한 바른정치연구회 준회원으로 가입, 정동영 전 의장, 천정배 법무장관, 신기남 의원 등 19명과 활동하며 낡은 정치 타파에 앞장서고 있다. 또 서울균형발전을 위한 국회의원모임과 정치커뮤니케이션연구회, 의원외교연구모임. e-스포츠 & 게임산업 발전을 위한 국회의원모임, 한류연구회, 칭찬포럼 회원, 문화정책포럼, 양성평등포럼, 국립공원을 사랑하는 국회의원 모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특위 등 회원으로 활동하며 그의 정치과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공보부 대표를 맡고 있는 지금. 노 부대표는 여야의 사학법 대치상황, 국회 원구성 협상 등 예민한 정치상황 속에서 열린우리당을 대변해 나가는 데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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