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산하 핵심 사업장인 현대자동차, GM대우차 노조 등이 산별노조로 전환키로 함에 따라 국내 노동계에 산별노조 시대가 개막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노동운동을 주도해왔던 현대차노조 등이 산별노조로 전환하면서 다른 대기업 노조는 물론 중소 노조들도 잇따라 산별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 5일 쌍용 자동차 노조도 산별노조 전환을 위한 조합원 투표를 실시한 결과 91.2% 찬성으로 산별노조 전환이 가결됐다고 밝혔다. 이날 쌍용차 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노조가 없는 르노삼성차를 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GM대우차, 쌍용차 등 국내 4개 완성차 업체 모두 산별노조로 전환하게 됐다. 노동부와 쌍용차 노조에 따르면 이날 투표에는 전체 조합원 5580명 가운데 4942명이 참여해 88.6%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개표 결과 찬성 4502명, 반대 401명, 무효 15명 등으로 집계됐다. 한편 현대제철, 현대하이스코, 세아제강, 비엔지스틸, 대경특수강, 동양석판, 삼미금속 등 7개 노조는 오는 18∼20일 산별전환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며, 산별전환투표가 부결된 노조와 미실시 노조는 오는 9월에 산별전환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처럼 거대 공룡 노조들인 자동차 노조 등이 산별전환을 함으로써 국내 노동계도 산별 시대로 접어들게 됐지만 노사정이 산별체제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상태여서 산별체제가 정착되는 동안 노사간 갈등이 심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노동계는 노동자의 단결력을 높이고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등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산별노조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은 산별 노조가 막강한 교섭력을 무기로 사용자를 무리하게 압박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기업 내부의 의제가 아닌 사회적 의제를 내세운 총파업 등으로 기업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교섭비용 증가와 노조의 정치성향 강화 등을 지적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노동계 전문가들은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것은 노동계와 경영계 모두에 ‘빅뱅’이라고 불릴 만큼의 충격파를 던져줄 사안인 만큼 노사정이 산별체제 정착을 위한 협의에 서둘러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산별노조의 개념
산별노조란 동일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조직 한 것으로 사업장 단위로 설립되는 기업별 노조와는 달리 동일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하나로 묶는 노동조합이다. 사업장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산별노조에 가입할 수 있어 비정규직과 중소 사업장 노동자도 공동교섭 등을 통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정규직, 비정규직, 실업자, 취업희망자 등 임금노동자의 전체 조직체계인 전국총연합조직(민주노총)은 산업별노조 지역조직이 근간을 이룬다. 산별노조 조합원들은 개별사업장 노조가 아닌 전국 중앙조직이나 산하 지역지부에 가입하고 조합비를 납부하기 때문에 산별노조의 힘의 중심은 단위사업장이 아니라 전국조직과 지역조직에 집중된다. 파업 등 교섭과 투쟁의 중심도 기업별 단위사업장이 아니라 산별노조이기 때문에 고립 분산적인 교섭과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총자본에 대응하는 강력한 공동교섭·공동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실업자, 해고자, 작은 공장의 노동자, 예비노동자 등도 가입이 가능하다. 또 산별노조는 단체교섭과 파업 등의 단체행동이 모두 중앙의 책임과 지침에 따라 이뤄져 기업별 노조보다 강력한 교섭력을 발휘할 수 있다. 현재 주요 산별노조로는 민주노총 산하의 금속노조와 보건의료노조, 한국노총 산하의 금융노조 등이 있다.
◆교섭ㆍ투쟁력 강화, 산별전환 추진
국내 주요 완성차 4개 노조 등이 산별노조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기업별 노조 체제하에서는 더 이상 투쟁력을 응집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노조 조직률은 지난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만 해도 20% 정도였으나 관행적인 파업과 노동계내의 비리 사건 등으로 일반 국민이 노동운동에 등을 돌리면서 지난해에는 10.6%를 기록, 사상 처음으로 10%대로 추락했다. 여기에 내년부터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이 금지되고 복수노조제 등이 시행되면 현재의 단위노조 체제로는 제대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위기감도 산별전환 추진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울러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로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가 이미 이뤄진 상태이기 때문에 산별노조 전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노동계가 주요 사회 세력의 하나로 거듭날 수 있다고 노동계는 기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노동계의 산별전환 추진은 여러 개의 노조를 단일노조의 깃발 아래 통합함으로써 공동교섭과 공동행동을 통해 교섭력을 강화하고 각종 사회 이슈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내겠다는 목표 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경영계와의 대립
경영계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큰 우리 사회의 여건을 감안할 때 산별교섭으로 원만한 합의를 도출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산별교섭이 이뤄지면 대기업 노조원들이 손해를 보고 중소기업체는 경영에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경영 여건이 다른 사업장의 노사가 일괄교섭을 통해 합의점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는 애초부터 산별교섭 결과를 사업장에 일괄 적용할 계획이 없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산별교섭으로 최저협약 또는 표준협약을 체결한 뒤 기업별 현실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시켜 나간다는 것이 일관된 입장이라는 게 노동계측 설명이다. 노동계는 또 산별교섭이 이뤄지면 각 산업의 평균값에 해당되는 협상결과를 도출, 적용하기 때문에 경영계 등이 비판해온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가 극복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대립되는 부분이 교섭비용 증가에 있다. 경영계는 산별노조인 금속노조 등의 예를 들면서 중앙단위에서 교섭이 이뤄지더라도 지부 또는 지회별로 이중, 삼중으로 교섭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교섭비용이 증가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금속노조의 경우 현대차 같은 대공장 노조들이 빠져 있었는데다 사업주들의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산별교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공장 노조가 참여하는 등 산별노조 체제가 정착되면 노사 공동으로 중앙단위 교섭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 하고 있다.
노동계는 또 산별노조는 개별 사업장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제조업 공동화나 직업능력개발 등 전체 산업의 공통적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경영계는 가뜩이나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불거진 정치적 성향이 이전보다 더욱 강해 진다고 보고 있다. 경영계는 산별노조 체제가 구축되면 가뜩이나 정치적, 전투적 성향이 강한 노조들의 정치 성향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노조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각종 정치, 사회적 이슈에 개입하면서 파업 등으로 인해 노사간 갈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게 경영계측 주장이다. 그러나 노동계는 산별체제로 전환하면 노조의 영향력 확대와 함께 책임도 커지기 때문에 노조도 파업 돌입 등을 결정할 때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산별교섭은 언제부터 시작되나
이렇듯 재계와 노동계의 심한 대립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산별교섭은 현재 당장은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본격적 산별교섭은 노동계가 산별노조를 정식으로 출범시켜야 이뤄지게 된다. 6월 이후 현대, 대우를 비롯한 자동차 노조와 13개 노조 등이 산별전환을 투표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산별노조 교섭방식과 교섭 적용범위 등에 관해서는 결정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의 산별교섭은 산별노조 규정 규약과 사용자단체 구성 등의 여건이 갖춰져야 가능하다. 이르면 내년부터 산별교섭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지만 사용자단체 구성 등의 후속 절차가 진행되지 않으면 산별교섭을 통한 공동 협약이 늦춰질 수도 있다. 국내 최초의 산별노조인 보건의료노조의 경우1998년 설립됐지만 실제 산별교섭은 6년이 지난 2004년부터 시작됐다. 그 마저도 사용자단체 구성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산별교섭 때마다 아직도 노사간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