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가슴은 뜨거운가, 역사의 요구보다 일상의 안위를 걱정하는 샐러리맨이 돼버린 것 아닌가 묻고 싶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이 11일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당직자 월례조회에서 당직자들이 나태함에 빠졌다고 질타하며 당직자들의 군기를 잡았다. 김 의장이 이 자리에서 "역사의 요구보다 일상의 안위를 걱정하는 샐러리맨이 돼버린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며 힘줘 말하는 것을 직접 듣고 있는 당직자는 90여명에 불과했다. 중앙당, 국회, 열린정책연구원 등에 흩어져 근무하는 우리당 사무처 당직자는 130명이 웃돌지만 김 의장이 새 사령탑에 오른 뒤 처음으로 소집한 월례조회에 나타난 당직자는 100명에도 못미친 것이다. 김 의장은"우리당이, 이른바 민주주의 세력이 난감하고 곤궁한 처지에 빠진 것은 우리의 나태함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면서 "국민의 정부부터 시작하면 집권 8년차이지만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일상이 요구하는 안이함, 나태함에 젖어든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내부적 붕괴 조짐' 에 우려를 표시했다.
취임한달 남짓 기대를 걸었던 김근태 의장 체제의 열린우리당이 흔들리고 있다.
위기의 열린우리당을 위해 "독배라도 마다치 않겠다"고 뛰어든 그이지만 같이 마실자가 주위에 없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김 의장의 실용주의 노선을 두고 여당 내 개혁 성향 의원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더욱이 앙상블을 이뤄야할 당의장-원내대표·정책위 의장간 투톱체제도 열린우리당의 진로설정 과정에서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다.
취임 직후 서민경제에 올인 하겠다고 강조하며 출범시킨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도 인선을 마쳤으나 김 의장 자신이 공동의장의 짐을 짊어지면서 옥상옥이 될 상황에 처했으며 출범 한달 가량이 흘렀지만 사실상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 이러다 또다시 정책이 표류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여기에 7.3 개각을 앞두고 김 의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비밀리 독대를 했던 것으로 드러나 계급장 떼고 한판 붙겠다던 그의 의지도 간데 없는 모습이다.
◆김근태의 '독배' 나눠 마실자 누군가
대선을 앞두고 정계개편이 예상되는 가운데 위기의 열린우리당의 독배를 함께 마실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김 의장은 11일 당직자 월례조회에서 "여러분이 샐러리맨 되려한다면 열린우리당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며 당직자들이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이라고 강조했다.
취임 한달을 맞은 지난 9일 기자간담회에서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책임 있게 나서야 할 분들이 여러 가지로 숙고하는 등 타이밍이 맞지 않는 일이 반복돼서 많이 어려웠다"며 당내에 책임감을 가진 인사가 없음을 토로했다.
당의 단합을 위해 당내 갈등으로 보일 수 있는 발언은 자제해달라고 당부하던 그가 오히려 그런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 의장의 쓴소리 행진에 대해 당 내부에서는 "누구도 당의 위기를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대위가 구성된 후 김 의장이 추진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바로 '인선'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비대위는 당초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를 의장 직속의 본부로 운영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야심차게 추진했지만, 이를 이끌어갈 사람을 구하지 못해 시간만 끌다 결국 김 의장이 공동대표라는 책임을 떠안게 됐다.
당시 원외 인사 섭외도 어려웠지만 원내 인사도 섭외할 수 없었다고 전해졌다. 당이 어려운 상황에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되면 '잘해야 본전'이라는 원망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일 확정한 주요 당직 개편도 마찬가지로 당의 살림을 맡게 될 사무총장에 마땅한 인사를 고르지 못해 일주일 정도 인선이 늦어졌으며 신임 사무총장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이 조직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이기 때문에 독배를 선뜻 받아드는 인물이 없었다. 결국 김 의장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원혜영 의원이 책임을 맡게 됐다.
여기다 나머지 당직 또한 대부분 정동영 전 의장이 선임한 인사들로 유임(6명)되는가 하면서 그 외 인사들은 친 김근태계로 채워졌다.
◆내부 불만 폭발직전
중앙당의 경우도 상황이 좋지는 않다.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2004년 4월 총선 외에는 한번도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직자들의 동력은 상당히 떨어진 상태. 여기에 짧은 기간 잦은 당의장 교체로 당직이 수시로 바뀌었으며, 그때마다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와 직원들의 원망을 사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기간당원제 등 문제로 인해 예전 선거를 위해 몸을 바쳤던 당원들이 잇따라 고발조치 되고 대거 빠져나가면서 사실상 당원조직이 수면위를 걷고 있는 상태.
비대위 내에서 책임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역시 김 의장을 답답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특히 비공개로 진행되는 비대위 토론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당내 갈등설을 부추기고 있는 것.
김 의장은 지난 7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익명의 방패 뒤에 숨어서 언론 정치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비공개 토론 중 유독 김 의장 측에 불리한 내용만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꼬집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개각 발표 이후 이런 마찰이 가시화 된 것을 두고 "기회를 노렸던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김 의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인사들이 개각을 기회로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김병준 교육부총리 임명과정에서 김한길 대표는 아직도 김 의장이 지난달 28일 대통령과 면담 때 '왜 김병준 불가'라는 당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는지 의아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지난 개각 때 드러난 미묘한 갈등은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과 각을 세울 때가 아니다"고 판단한 김 의장측과 "노 대통령과 부딪히더라도 개각문제만큼은 당의 입장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김 대표간 인식의 차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김 의장은 취임한달 기자간담회에서 "늪을 건너 마른땅으로 온 느낌"이라며 당의 위기상황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당 전반에 넓게 포진해 있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전환되지 않으면, 그가 디디고 있는 '마른 땅'은 가시밭이 될 것이다.
김 의장이 11일 월례조회에서 "당의 처지가 매우 곤궁하고 어렵다. 하다못해 재정형편도 그렇다"며 "여러분과 고위당직자가 함께 마음과 지혜를 모으면 국민들의 공감과 참여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지도부가 먼저 하겠다"고 약속했다.
◆곳곳이 지뢰 난제들 잔뜩
김근태 비대위 체제가 풀어야 할 난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돼 온 당의장-원내대표·정책위 의장간 투톱체제도 그 중 하나. 당장 당의장 직속의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와 원내대표 산하 정책위원회간에 당의 정책·노선 설정을 둘러싼 미묘한 대립이 투톱체제의 재점검을 요구하고 있다
평상시라면 당의 전반적인 운영은 당의장이, 당정간 정책조정이나 정책입안의 책임은 원내대표나 정책위 의장이 맡겠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비상'이기 때문에 당의장 중심의 비대위 체제가 당운영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의견과, 당의장 중심의 비대위 체제를 인정하더라도 당의장-원내대표·정책위 의장간 기본적인 권한과 업무분장이 무너져서는 자칫 당내 불협화음을 부추길 수 있다는 입장이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투톱의 한 축인 원내대표·정책위 의장 입장에서 보면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는 '옥상옥'이다. 위원회의 활동이 강화되면 될수록 원내대표나 정책위 의장의 역할과 권한이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의장 중심의 리더십을 세우자'는 비대위 체제의 기본취지를 생각하면 원내대표·정책위 의장의 역할 축소는 어쩌면 당연하지만 현실은 다가올 정기국회에 대비해야 할 시기인 만큼 정책을 만들고 조율하는 원내대표의 역할이 무시될 상황이 아니다.
당의장과 원내대표가 정책과 관련해 비슷한 노선을 견지하고 있으면 투톱체제의 문제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김근태 의장과 김한길 원내대표, 강봉균 정책위 의장이 노선차이를 보인다면 투톱시스템은 아무리 비대위 체제라 할지라도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에 대한 재검토 과정에서 드러난 잡음은 이를 방증한다. 강봉균 정책위 의장이 "봉급생활자들의 근로소득세를 내리는 방안을 당정이 합의했다"고 어느 언론과 인터뷰에서 밝히자 당의장측은 당내 논의과정조차 설익은 내용을 정책위 의장이 얘기했다며 불쾌해 했고, 결국 강 의장은 비대위 비공개 회의에서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반(反) 김근태 여론
내부 불만, 원내대표와의 갈등 속에 김 의장은 실용주의 노선을 두고 발발하는 여당 내 개혁 성향 의원들의 원성에 부딪혔다.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신기남 의원이 이끄는 신진보연대는 14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서민경제 활성화'를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역대 정권에서 행한 인위적 경기부양이 오히려 서민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며 이 같이 지적했다. 신 의원은 특히 "분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을 통해 가시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고용안정보다는 재벌위주의 정책을 펴는 것은 열린우리당의 정책이 될 수 없다"며 "정책유연화로 포장된 '우회전'은 참여정부와 우리당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날 토론회 발제자들도 당 정책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웠다.
경원대 홍종학 교수는 하루 앞서 공개된 발제문에서 강봉균 정책위의장이 주장한 경기부양정책을 '집권 4년차 증후군'이라고 비판했다. 서민경제를 내세우면서도 재벌 봐주기, 건설경기 부양 등의 정책을 펼쳐 차기정권에 부담이 될 정책을 밀고 나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대구 가톨릭대 전강수 교수는 정부와 여당이 재산세를 완화하기로 결정한 것과 관련해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이 전면적으로 후퇴될 물꼬를 텄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미 FTA 협상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한신대 이해영 교수는 "정부가 추진중인 한미FTA는 정부가 과제로 삼은 '양극화 해결'과는 함께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NAFTA 등 외국의 사례가 보여주듯 한미FTA로 인해 우리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서민경제활성화는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