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 싶다
그곳에 가고 싶다
  • 남지연
  • 승인 2006.07.1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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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세상 속으로
이국정취 물씬 나는 외국인마을 탐방기 1985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던 프랑스학교가 반포로 옮겨 오면서 자연스레 프랑스인촌이 생겼다. 서래마을을 비롯해 용산구 이촌동 ‘리틀 도쿄’, 인천 ‘차이나타운’, 경기 안산시 ‘국경 없는 마을’ 등 수도권에는 크고 작은 외국인촌이 있다. 또 다른 한국 문화 속으로 여행, 이색적인 추억 만들기에 빠져보자. ♥ 한국의 몽마르뜨 언덕, 서래마을 ‘Attention ´ecole(학교 앞 주의).’ 프랑스어와 한글이 나란히 적힌 표지판이 보인다. 국기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하양 3색 보도블록, 노천카페와 와인 숍, 바게트 빵집까지 프랑스 향취가 물씬 풍긴다. 지하철 3ㆍ7호선 고속버스터미널 역 5번 출구를 나와 이수교 방향으로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육교. 그 아래 왼쪽으로 걸린 이정표 ‘서래로.’ 굳이 프랑스 파리로 가지 않더라도 프랑스를 경험할 수 있는 ‘프랑스 마을’의 초입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 서초구 반포4동, 흔히 서래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프랑스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로 알려진 몽마르뜨 언덕의 이름을 딴 몽마르뜨길, 프랑스 분위기 물씬 풍기는 레스토랑과 카페, 프랑스인 파티쉐가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재료로 빵을 만들어 낸다는 제과점, 프랑스인이 설계했다는 빨간 지붕의 다세대 주택 단지. 카페와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버스 정류장에서도 프랑스어를 볼 수 있다. 웬만한 상점 안의 메뉴는 불어와 영어로 정리돼 있다. 심지어 공인중개사 사무실의 출입문까지. 물론 불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이다. 프랑스어로 된 수많은 간판의 레스토랑과 카페들 안으로 들어서면 프랑스인이 손님을 맞을 것 같지만, 파리크라상의 파티쉐를 제외하면 실제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가게는 한 군데도 없다. 이곳 프랑스 마을은 용산구 한남동에 있던 서울프랑스학교가 1985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프랑스인 집단 거주지. 주한프랑스대사관 직원, 상사 주재원 등 600명 정도의 프랑스인들이 한국인과 어울려 살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전체 프랑스인 1,500여 명 중 40%에 해당하는 수다. 떼제베(TGV), 까르푸, 르노삼성 등 프랑스 기업이 한국에 속속 들어서면서 더욱 활기를 띠는 곳이다. 특히 이들은 프랑스인 모임(AFC · Association For French in Corea) 을 통해 한국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고 다양한 정보까지 공유한다. 프랑스인 거주지역으로 인기를 끌다보니 프랑스어를 공유하는 벨기에나 다른 유럽 여러 나 라 거주자들도 이 곳을 선호하고 있다. 현재 가구 수는 총 7000세대 정도다.
♥ 서울 속에 꽃핀 정갈한 풍경, 일본에 온 듯 서울 중심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외국인 마을. 서울의 외국인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 용산구 이촌동의 일본인 마을이다.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맞은편으로 보이는 한가람 아파트와 그 너머에 있는 한강맨션, 코오롱 아파트, 강촌 아파트 등지에 5,000여 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다. 이촌동에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된 일이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하나둘씩 모여들던 것이 1994년 남산 외인아파트가 철거되면서 일본인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침이면 스쿨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를 등교시킨 일본인 주부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저녁이면 선술집에서 일과를 마친 일본 대사관 직원과 기업 주재원이 잔을 부딪친다. 일본어가 통하는 미용실, 병원을 비롯해 일본인 전용 창구를 둔 은행 등이 있어 생활이 불편하지 않다. 일본식 라면과 덮밥을 파는 음식점은 한국인에게도 인기. 어디든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곧 이곳이 ‘일본 마을’임을 실감하게 된다. 많은 음식점들의 메뉴가 일본어로 되어 있는 탓이다. 편도 2차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아파트 단지들이 늘어선 간결한 도시 풍경도 그러고 보면 한국의 여느 도시에서도 구경하기 힘들다. 처음에 이곳을 일본과 연결짓기 어려웠던 것도 건성으로 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던 것이 단아하고 정갈한 일본의 이미지를 닮은 탓이었다. 일본에 대해 여간해선 우호적이지 않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곳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어떨까. 일본산 식료품 가게, 모노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이마무라씨는 최근 불고 있는 한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다. “13년 전에 한국으로 시집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단순히 ‘한국으로 시집가나 보다’했던 친구들이 요즘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즘 한국에서, 그것도 한국 남자랑 살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고 했다. 또 그는 요즘 한국-일본 커플의 수는 10년 전에 비해 10배 이상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상점에서 만난 츠자키 코이치씨 가족. “양국간에 민감한 일이 터지면 약간의 긴장감이 도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인 부인과 함께 일본을 드나들면서 느끼는 점은 한국의 일본 사람도, 일본의 한국 사람도 어딜 가든 자기 고향처럼 편안하다는 겁니다.” 한일 갈등은 몇몇 정치인들에 의한 문제일 뿐, 확대해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 역사 깊은 차이나타운 붉은 기둥에 지붕을 얹은 중국식 대문 패루(牌樓) 안으로 중국이 펼쳐진다. 1883년 인천항을 개항하며 형성된 인천 중구 선린동 차이나타운이다. 1만여 평에 이르는 이곳에는 상점 처마에 걸린 홍등, 굵은 황금선이 몸통을 둘러싼 가로등, 화교중산학교 인근 골목길에 그린 135m 길이의 삼국지 벽화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걷다가 슬슬 배가 고프면 자장면을 먹으면 된다. 자장면 원조거리답게 20여 개의 중국음식점이 즐비하다. 딤섬 북경오리 양고기 샤브샤브와 같은 먹을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인천시는 2010년까지 영국 러시아영사관 등 구한말 개항 당시의 건물 8개를 복원하는 등 차이나타운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 애환 스민 가리봉 중국동포타운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에서 가리봉시장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중국말로 된 표지판이 눈에 많이 띈다. 이른바 ‘가리봉 중국동포타운’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서로 도우며 신뢰를 쌓자”는 푯말부터 중국음식점과 노래방, 중국술집 등이 모여 있어 흡사 중국의 한 거리를 옮겨 놓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곳은 90년대 구로공단의 공장들이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중국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구로공단이 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하면서 공단 근로자들이 주로 거주하던 쪽방 밀집지역이 한국계 중국인들로 채워진 것.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곳은 중국음식점이다. 간판에 중국말이 쓰여 있는 이른바 ‘중국집’은 그야말로 한 집 걸러 있을 정도로 많다. 대부분 이 곳에 정착한 조선족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길 한복판에 위치한 중국집 홍등루 주인인 서광해씨는 “중국 음식점은 특유의 매운 기름 맛으로 인기가 좋아 단골들이 찾아오는 추세”라고 말했다. ♥ 동대문 중앙아시아촌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서쪽에 자리 잡은 서울 중구 광희동 일대에는 러시아인 들이 많이 몰려 일명 ‘중앙아시아촌’으로 불린다. 사실 공장지대가 아닌데도 중앙아시아촌이 들어선 이유는 러시아와 인근 국가의 보따리상들이 동대문 일대 의류시장을 자주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됐기 때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등지에서 살던 고려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중앙아시아촌 상권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 곳에는 정통 중앙아시아 요리를 내놓는 상점들이 꽤 많다. 광희빌딩 뒤편 음식점인 ‘크라이 노드노이’는 중앙아시아 노동자들이 특히 많이 찾는 곳이다. 이 외에도 카페 ‘사마리칸트’에선 쯔예플라토나 타바카, 플로브 등 러시 아 요리를 직접 판매해 고향 향수를 느끼려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음식점인 ‘마이 프렌드’도 이 지역 명소로 꼽힌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직접 넘어온 요리사가 색다른 맛을 선보인다.
따뜻한 남쪽의 독일마을 유럽풍 건축미로 아름답기로 소문자자 '따뜻한 남쪽’ 남해도의 끝자락 삼동면 물건리 언덕배기에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유럽풍 건축미가 물씬 풍기는 뾰족한 지붕과 주황색 기와를 얹은 주택 20~30여 채가 아담한 촌락을 이루고 있다. 독일마을이다. ‘독일마을’이라는 간판을 따라 마을에 들어서면 태극기와 독일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파란색 눈을 가진 독일 노인들이 한국 할머니들과 이야기하며 집 앞 정원을 가꾸고 산책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독일교포들의 집단 귀향촌 여느 외국인 마을처럼 자연스럽게 생긴 것과 달리, 독일 문화와 남해 전통문화 예술촌을 연계한 특색 있는 관광지를 개발하고, 전국 최고의 노인 인구비율(24.7%) 등을 타개하기 위해 경남 남해군이 독일교포들의 집단 귀향촌으로 꾸민 마을이다. 여기서 말하는 독일교포들은 경제난을 겪던 1960년대 조국근대화와 경제발전에 헌신한 독일거주 교포들을 일컫는다. 1961년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경제 개발과 산업화를 위한 많은 자금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해 독일이 간절히 요청하던 광산 노동자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3,500만 달러의 외화 벌이에 나섰다. 당시 한국은 가난에 찌들어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시절. 한국의 수많은 남자들은 광부란 이름으로, 여자는 간호사라는 이름으로 이역만리 타국 땅으로 건너갔다. 당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한국으로 송금해 오는 금액은 우리나라 총 수출액의 30%에 해당하는 거대한 액수였다. 그들은 당시 국무총리 월급보다 많은 월급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교포들은 40도가 넘는 지하 1,000~3,000m에서의 작업은 ‘팬티를 다섯 번을 짜서 입고, 장화 속에 고인 물을 열 번은 쏟아야’ 비로소 끝나는 하루 일과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3년 뒤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던 그들의 바람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조국에서 못 이룬 꿈을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가족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와 쉬고 싶은 이들의 염원을 담아 만든 것이 독일마을이다. ▲ 독일의 자재로 전통 독일식 주택 고집 주택건축은 독일교포들이 직접 독일에서 자재를 공수하여 전통 독일식 주택을 신축했다. 교포들이 원할 때 언제든지 들어와 쉴 수 있고, 그들이 독일에 가 있는 동안에는 남해를 찾은 관광객들을 위해 민박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독일마을은 남해군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삼동면 동천마을 문화예술촌 안에 조성돼 산과 바다를 함께 조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바로 앞으로 펼쳐진 방조어부림의 시원한 바다 풍경과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드라이브 코스인 물미 해안도로를 비롯, 2006년 독일 월드컵과 연계돼 남해의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국내 독일어 전공 학생과 독일인 관광객에게는 ‘필수방문코스’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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