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전당대회 이후 범(凡)박근혜 계열의 강재섭 대표와 친이(親李·친 이명박)계열의 이재오 최고위원간의 혈투로 삐걱거리고 있다.
7.11 전당대회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색깔론'에 대한 책임과 '당과 민심의 괴리' 등을 놓고 강 대표와 신경전을 벌인 이 최고위원은 경선일 이후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치 않고 1주일간의 산사칩거에 들어갔다가 18일 당무에 복귀하고서는 단 하루만에 다시 최고위원회에 불참하는 등 의도적 흔들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강 대표가 이번 경선에 나섰다 쓴잔을 마신 푸른모임의 권영세 대표 등을 지명직 최고위원에 기용하는 등 주류체제를 의식한 중도파 끌어안기에 나서면서 이 최고위원은 이에 반발한 수요모임의 주도세력인 남경필, 정병국, 박형준 의원 등을 세력으로 규합하기 위해 틈새를 노리는 모습이다.
푸른모임이 소장파 가운데 중도파에 가깝다면 수요모임은 강한 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 최고위원의 성향과도 일정부분 상통한다.
더구나 향후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강 대표의 힘을 의식한 이 최고위원이 '국민참여경선 방식'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남경필 의원 등이 이에 동조하고 있으며 이에 강 대표는 "말도 안 된다"고 맞받아치는 등 수면 밑에 깔려 있던 갈등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
◆김영삼 만난 이재오 파격행보로 강재섭 때리기 본격화
18일 당무 복귀 이후 19일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 '예고 없이' 불참한 이재오 최고위원은 이날 오후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총재를 잇따라 방문하는 등 당대표에 버금가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앞서 강 대표는 지난 13일 이 전 총재는 취임인사차 방문했으나, 김 전 대통령의 경우 따로 만나지 않았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이 최고위원을 만난 자리에서 전대 당대표 경선과 관련, 박근혜 전 대표가 이 최고위원의 연설 도중 자리를 옮긴 것은 "잘못됐다"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김 전 대통령은 '친박(친 박근혜)'-'친강(친 강재섭)' 일색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당직 개편에 대해서도 "과거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주류-비주류 경쟁을 하며 신민당을 이끌 때도 서로 당권을 잡았을 때 최소한 6:4의 비율로 비주류를 배려했다"며 '쓴 소리'를 냈다.
이 최고위원은 앞서 오전 당 차원의 수해대책 논의를 위해 서울 염창동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 연석회의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강 대표는 이날 회의에서 "중진의원 중 박희태 의원과 이상득 국회 부의장은 지역수해 관계로 복구에 신경 쓰느라 불참했다"고 밝혔으나 이 최고위원의 '행방'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이 최고가 '회의 불참'을 사전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이 최고위원측은 "오늘 회의는 특정 안건을 의결하는 자리가 아닌데다, 이 최고위원이 아침 일찍부터 지역구(서울 은평을)내 수해현장을 돌아보는 등 다른 일정이 있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이 최고가 강재섭 대표의 당 운영방식과 인사 스타일 등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이 최고위원은 1주일간의 '칩거'를 끝내고 당무에 복귀한 첫날인 18일 오전 최고위원회의 자리에서도 7.11전당대회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색깔론'에 대한 책임과 '당과 민심의 괴리' 등을 놓고 강 대표와 신경전을 벌인 바 있다.
이 최고는 또 이날 회의에서 김형오 원내대표와 전재희 정책위의장이 제시한 수해 대책에 대해 "막연하게 할 게 아니라, 지역별로 최고위원을 반장으로 임명해 현장에 상주토록 하는 등 피해 복구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 이를 관철시켰다.
신임 당직자 임명장 수여식과 의원총회에도 모두 불참했다.
이와 관련, 이재오 최고위원도 이날 CBS라디오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 출연, "당권을 가진 사람이 자기 책임 하에 당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선거 때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로 채우기 마련이다"며 당직 인선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더구나 이 최고위원이 향후 대선후보 경선의 공정한 관리를 위해 "당 경선관리위원회를 조기에 구성토록 하고, 경선 선거인단 비율도 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강 대표가 "말도 안된다"며 즉각 반박하고 나서는 등 두 사람간의 '갈등'이 거듭 표출돼 출항 초부터 예고된 '강재섭호'의 삐걱거림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모양새다.
이재오 최고위원은 강재섭 대표의 '재보선 지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7.26재보선 유세 지원에도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강재섭 주류체제 강화로 이재오 벼랑 끝으로 몰기
강 대표는 18일 사무총장에 3선의 황우여 의원을 임명하는 등 당직 개편을 단행했다. 박(朴)의 사람들로 인선이 대부분 이뤄진 것이다.
이날 사무총장에 임명된 황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의 비서실장 출신. 최고위원에는 권영세 의원과 한영 전 최고위원이 지명했다. 권 최고위원은 소장·중도파 모임인 '미래모임' 출신으로 중도파이고 한 최고위원은 5·31지방선거 당시 광주시장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다.
공동대변인인 나경원(초선) 의원은 대표경선 당시 강대표의 홍보를 총괄했고 유기준(초선) 의원은 친박 인사로 꼽힌다.
이번 당직개편에서 기용된 소장파는 소장·중도파 연합체인 '미래모임' 소속 의원들이지만 전통적인 소장개혁파라기보다는 중도파에 더 가깝다. 권 최고위원을 비롯해 여의도연구소장에 임명된 임태희(재선) 의원은 '푸른모임'의 공동대표다.
그러나 수요모임의 주도세력인 남경필, 정병국, 박형준 의원 등은 이번 당직개편에서 한명도 기용되지 않았다.
이 최고위원은 당장 대선후보 경선 방식을 놓고 강 대표에게 한판 싸움을 걸었다.
"대선후보 경선을 완전 국민참여제로 하거나, 국민여론 비율을 높이자"고 이 최고의원이 주장하고 나선 것.
강 대표는 곧바로 "경선 방식 변경은 없다. 지금 방식대로 한다"고 일축했다.
닷새간의 산사 칩거를 끝내고 당무에 복귀한 이 최고위원은 1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심과 당심의 괴리를 거론하며 "대선 주자는 국민 참여 경선제로 뽑아야 한다"며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그는 "열린우리당에서 완전 국민참여 경선으로 하겠다고 운을 띄웠는데, 우리도 정말 국민이 어떤 형태의 정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 지도자를 원하느냐에 초점을 둬야 한다"며 "당원이 누구를 좋아하느냐를 갖고 국민의 대표를 뽑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말했다.
이같은 주장은 전날 단행된 당직 인선에서 '친박(親朴)' 진영이 주로 발탁되는 등 당내 구도가 급격하게 박근혜 전 대표 성향으로 흐르는 상황에서 현재 방식대로 경선을 치를 경우 박 전 대표의 승리 확률이 높을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이명박 시장의 측근인 정두언 의원과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소장파 남경필 의원도 국민 참여 확대를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19일 강재섭 대표는 특정인의 유·불리를 떠나 지금 방식대로 경선을 해야 한다며 경선제도 변경을 반대했다.
강 대표는 "당 혁신위원회가 경선방식을 만든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경선 안을 시행해 보지도 않았는데 시기와 룰을 바꾸자고 하는 제안은 말이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 대선후보를 뽑는데 국민여론을 50%, 당원과 대의원 의견을 50% 반영하는 데 더 이상 얼마나 나가라는 것이냐"고 일축하고, 당내 갈등에 대해선 "1단계를 넘었지만 끊임없이 갈등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동묘지 앞의 고요함'보다는 시끌벅적한 것이 정당으로서는 국민 관심도 얻고 좋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주요 당직 인선과 이 최고위원의 당무 복귀로 일단 안정을 되찾은 한나라당은 앞으로 대선후보 선출 방법과 시기를 두고 상당기간 내홍을 겪을 전망이다.
◆이재오, 남경필 긴급연대 움직임 꿈틀
"정치에서 세 싸움은 당연하지만 이번에는 금도를 넘어섰다고 본다. 강 대표는 내놓고 대리전이라고 했고 그것을 이용했다. 한나라당의 시계바늘을 1980년대로 되돌려 놓은 강 대표는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당내 수요모임 대표이자 이번 경선과정에서 미래모임 단일화 경선에 참여해 권영세 의원에게 과감히 자리를 넘겨주고 한발 물러나 있던 남경필 의원은 18일 강 대표가 친박계열로 당직개편을 단행하면서 이 최고위원의 손을 들고 나왔다.
그는 지난 14일 당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색깔론'을 거론한 강재섭 대표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더니 18일에는 전당대회 이후 당 전체의 상황을 고려할 때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며 당내 각성이 필요할 시점임을 강조했다.
남 의원은 이날 먼저 강재섭 대표의 '사과'를 다시 한번 요청하며 "이 구조로 대통령 후보 경선을 치른다면 한쪽 진영에서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또는 민심과 당심이 괴리된 구조를 안고 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전당대회 이후 반발의사 표현으로 출근을 거부했던 이재오 대표에 대해서는 비교적 유한 태도를 보이며 "이 최고 위원으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고 그 정도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전당대회를 통해 드러난 당심과 민심의 분리에 대해 "대의원 구성이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 남 의원은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민심과 당심이 같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 지도부가 보수로 회귀한 것과 관련 남 의원은 "국민들이 받는 이미지는 '도로 민정당'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예단하지는 않겠다"며 "변심이 쉽지는 않겠지만 처절하게 노력하고 대오각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사무총장 등 당직 인선으로 변화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도 소장파 참패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 남 의원은 "대리전 양상에 휩쓸려 소장·중도파가 왜소해진 것을 간과할 수 없다"며 "다른 측면에서는 미래모임에서 시작된 세 불리기 싸움이 전대 전체에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이어 소장파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일고 있는데 대해 남 의원은 "쓴소리를 자주하다 보니 당하는 사람이 생겼고, 싫어하는 사람이 생긴 것은 사실"이라며 "당내 누군가는 문제제기를 해야 하며 소장파가 그런 역할을 하다 보니 입지가 좁아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소장파의 미래에 대해서는 '개혁'이라는 '화두'는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욕을 좀 먹더라도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당의 나갈 방향에 대해 "중도세력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켜선 안된다"며 "2002년 대선에서 진 이유 중 하나는 젊은층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권위주의 시대로 돌아갈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혐오감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남 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가 2년간 대표를 하면서 그런 점을 상당히 불식시켰지만 이번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다시 2002년으로 돌아간 느낌"이라며 "박 전 대표의 가장 큰 치적이 전대를 통해 날아가 버렸다는게 내 생각"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