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복잡다단한 정치를 알기 쉽게 풀어낸 ‘정치 만화’. 그러나 그 안에는 무시 못할 이데올로기가 숨어
어느 때건 정치판이 어지럽지 않은 때가 없건만, 그럼에도 요즘만큼 전국민의 눈과 귀가 모두 '정치'판으로 쏠려 있는 상황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에 유난히 관심있던 이들이야 매일 신문 보는 일이 마치 경마 레이스처럼 흥미진진할 테지만, 먹고 사느라 바쁜 일반인들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정치 구도가 도통 이해가 안 가고, 그 중심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캄캄하기만 한 일. 이런 때에 톡톡한 실력 발휘를 하는 것이 바로 '만화'일 듯도 싶다. 만화의 학습효과에 대해선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이지만, 가장 민감하고 위험한 영역인 '정치' 문제에까지 만화는 가감없이 펜을 놀리며 어렵고 복잡하기만 한 정치 세계의 배경과 뒷 이야기를 정치 문외한이라도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려내 많은 호감을 사고 있다. 이번에는 이처럼 정치적으로 혼란스런 시기에, 정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해 시중에서 판매되는 정치 만화들 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골라 각각의 개성과 숨어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이즈미 총리의 모델? 히로카네 켄시의 "정치 9단"
"시마과장"과 "시마부장"을 통해 일본 대기업의 생리와 기업전쟁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여 큰 인기를 얻어낸 '극화 작가' 히로카네 켄시의 "정치 9단"은, 사실 제목과는 정반대로 가장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정치관을 가진 '정치 초년생'이 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과정을 그려낸 '정통 정치 극화'이다.
건설대신을 지낸 정치계 거물의 아들인 카지 류우스케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일본에서 큰 지지를 얻고 있는 '2세 정치인'으로 정치계에 입문, 이어 그가 목격하고 싸워 이겨나가는 일본 정치계의 현실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낡은 파벌정치가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펼쳐지고, 외교감각이 둔한 정치가들이 세계사회의 '사인'을 이해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음모와 술수와 비리가 가부키쵸 가득 들어차 있다. 이들 부패한 시스템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카지 류우스케의 우직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통쾌감을 느끼게끔 해주는데, 사실 그의 '의견'(이 만화의 원제는 '카지 류우스케의 의견'이다)을 잘 살펴보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현 총리대신의 그것과 놀랄 정도로 닮아있다.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에서부터 특유의 '구시대 망각적' 외교관과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입장에 이르기까지, 고이즈미 총리의 정치관과 일맥상통하는 이 만화의 정치관은, 일단 무엇이 무엇을 카피하고 있는 것인지 헛갈릴 정도이며, 이른바 '신 우익'으로서 분류될 수 있는 정치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독자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어, 일본의 정치 체계를 이해한다는 기본 입장을 넘어서 어딘지 위험스럽다는 느낌까지 전해주고 있다.
미국의 선거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 카와구치 카이지의 "이글"
사실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모델을 제시한 것은 분명 미국일진데, 정작 미국의 정치제도와 선거제도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공부하고, 파악하며, 비판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시중의 미국 정치 관련 서적들은 지나치게 전문적이어서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막상 우리에게 와닿지 않아 쉽사리 손을 놓게 되는 것이 사실. 이렇듯 '미스테리 아닌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미국의 정치판과 선거 시스템에 대해 묘사한 '일본 만화' "이글"은, 그 독특한 배경 설정 면에서 일단 점수를 따내고 있다.
"이글"의 작가는 바로 '군국주의'의 상징적인 만화로서 수많은 비판을 받아온 "침묵의 함대"의 작가 카와구치 카이지. 그러나 "이글"을 살펴보면, 그가 단순히 '일본제국의 부활'을 부르짖는 정치적 괴변자가 아니라 그저 '강력한 중앙정치 시스템'을 지지하는 열혈 정치 매니아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일본계 이민 2세대 청년이 정치계 거물 집안과의 결혼으로 미국 중앙 정치계에 입문, 이어 '대통령'을 목표로 선거에 뛰어든다는, 다소 거창한 테마를 지니고 있는 "이글"은, '일본계 미국대통령 출마자'라는 억지스런 배경을 깔고 있어 부담스럽긴 해도 미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빈곤대책과 인종차별 문제, 교육 개혁, 마약 퇴치와 총기 규제 등의 이슈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총괄적으로 다뤄내고 있고, 미국 특유의 경선 시스템과 선거에 관한 법률 등, 선거 제도에 대한 소개도 겸하고 있어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카와구치 카이지는 과연 일본 만화가답게 미국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공격하고, 보다 공생적인 세계관을 가질 것을 '충고'하고 있는데, 이런 주장들이 때때로 실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비단 그의 화려한 '경력' 탓만은 아닐 듯 싶다.
초보자를 위한 '알기 쉬운' 정치입문서, 안도 유마+아사키 마사시의 <쿠니미츠의 정치>
위의 두 작품, 두 작가들에 비해, "쿠니미츠의 정치"와 그 작가 안도 유마(글), 아사키 마사시(그림) 콤비는 전혀 다른 배경과 입장을 지니고 있다. 일단, 이들 콤비는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 다뤄본 일이 없는, 호러-환타지-추리 만화("미스테리 극장 에지")로 이름을 알린 팀이며, "미스테리 극장 에지"에 등장한 단역급 캐릭터를 주인공을 내세운 "쿠니미츠의 정치"는 굵직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 않는, 단순하고 명명백백한 '사회 정의'만을 고집하는 한 막무가내 청년의 '정치입문서'에 속한다.
때문에 우리 독자들에게도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져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데, '신치바가사키'라는 가상의 지방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시장 선거를 배경으로 한 "쿠니미츠의 정치"는 '정치적 주장'보다는 '정치가들이 벌일 수 있는 비리'의 가지각색 온상들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지방 선거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아기자기한 선거 전략들 - 선거 포스터에서부터 '선거법을 피해나갈 수 있는' 간접적 선거운동 방법에 이르기까지 -을 차례로 제시해 보이고 있다.
정치는 물론 기본적인 지식/상식조차도 부족한 인물을 타이틀 롤로 내세운 만큼 설명 자체도 간략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져 있고, 이것도 모자라 책 말미에는 따로 만화 속에 등장한 정치 문제에 대해 자세한 설명까지 더해져 있어, 심지어 초등학생들 - 어쩌면 이 만화의 '진짜' 타겟층일 수도 있겠다 - 마저도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 다감하게 접근하고 있다. '먼' 곳에서 '높은' 사람들이 벌이는 정치가 아니라, 실제 생활과 관련있는 정치에 대해 관심있는 모든 계층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법한, 유쾌한 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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