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을 날짜로 따져보면 우리가 살아갈 날은 큰 사고가 없으면 대략 3만날 정도가 됩니다. 만 50을 넘었으니 이제 절반인 2만 날에 가까운 날을 산 셈이죠. 이제 1만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보면 인생은 참으로 짧은 것입니다... 허허허” 민주당 내 모든 목소리는 그의 입에서 나온다.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행정고시와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그의 이력에서 풍겨 나오는 것과 달리 흑산도 시골에서 태어나 지극히 서민적이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를 느껴지게 하는 이상열 대변인이 바로 그이다. 50줄을 넘긴 나이, 희망의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이 대변인. 그가 걸어온 고난의 삶과 앞으로 펼쳐질 국가적 사명에 대한 그의 남은 인생을 들여다봤다.
◆새까만 흑산도 섬마을 소년에서 서민편에 서기까지
1974년 제 15회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난 뒤 당시 이 대변인은 행시 합격자들이 희망하던 내무부나 경제기획원, 재무부 등의 근무기회를 뿌리치고 노동자와 서민들의 편에 서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이 꺼려하는 노동청을 희망해 근무한다.
그러나 노동청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는 이른바 12.12쿠테타를 겪는 다.
국보위가 국회를 대신하여 법률을 제정하거나 고치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국보위는 법률개정작업을 하면서 노동법을 주요대상으로 삼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대폭 변경하는 것.
당시 80년대 초반시절에는 지금과는 달리 노동자들이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노동관계법을 노동자들에게 더 불리하게 고치는 작업에 행정사무관이던 이 대변인이 실무자로 참여해야 했던 것.
당시 노동청장이나 노동청 국장은 국보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가타부타 이야기 하지 못하고 무조건 따라야만 되는 시절이었다.
이때부터 심각한 고민을 했던 이 대변인은 “내가 뭔가 노동자들의 현익을 옹호하고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노동청에 왔는데 막상 와서 노동자들을 옭아매는 일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괴로운 날의 연속이었다”고 밝혔다.
"사법시험을 공부하자, 법을 공부해서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자”라고 생각한 이 대변인은 그길로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당시 이 대변인은 “사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대변인은 노동청에 근무하면서 사법시험공부를 하게 됐지만 막상 공부를 하자고 보니 자꾸 나태해지고 잡념에 빠졌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나태해지고 포기하면 작게는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의 실망과 좌절 크게는 이 땅에 소외받는 모든 이의 고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생각한 이대변인은 그해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연수원을 거쳐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부와 명예를 버리고 목포를 사랑하기까지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이 대변인은 당시 대학 선배로써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종원 전 법무부 장관으로 인해 일약 스타 변호사 반열에 올랐다.
수임 사건에 치밀한 조사와 논리적인 변론은 요즈음 말로 떠도 한참을 뜬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점차 이대변인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수임사건은 날로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재산에 대한 욕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변호사. 이것이 성공한 변호사일까’라고 생각한 이 대변인은 그날 밤차로 목포에 내려갔다.
고향을 둘러보고 반갑게 맞이하는 고향인척들을 보고난 이 대변인은 그날 해질녘. 서울행을 결심한 마을의 뒷산에 올라 고향인 목포에 돌아와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했다.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음에도 그 복을 한번에 차버리는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몰아세우는 주위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목포생활을 시작한 이 대변인은 그의 이력에서 말해주듯이 봉사와 신앙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목포대학교 법학과 강사를 하며 목포 결식아동돕기 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았고, 대불대학교 겸임교수로 후학양성에 이바지했으며 목포 변호사회 직전 회장과 기독실업인회 목포지회 회장, 목포시 고문변호사로 활동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변론도 맡았다.
또 신안군 고문변호사로 고향 행정단체를 위해 일했고 목포 YMCA 증경 이사장, 전남 서남권 발전연구회 공동의장(현), 주식회사 행남자기 고문변호사, 한국제분 주식회사 고문변호사, 현대 삼호중공업 주식회사 고문변호사, 영암군 고문변호사, 태양라이온스클럽 명예회장(현)으로 있으면서 지역 경제발전에도 한몫했다.
대한노인회 목포지회 고문변호사와 목포시 축구협회 자문위원(현), 목포시 지체장애인협회 고문변호사, 사단법인 전남 곰두리 봉사회 법률이사(현), 재목 신안향우회 고문변호사 등을 맡으며 남을 위한 헌신의 삶도 마다치 않았다.
◆인생에 대한 희망의 고민
어느덧 54살의 나이. 이 대변인은 “남들이 보기엔 사시·행시도 합격하고, 지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른바 ‘잘나가는 변호사'로만 인식될 것이지만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그 사이의 세월은 많은 시련과 좌절을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소회했다.
그는 “지난 50평생은 나를 이기고 극복하기 위해 투지를 불살라왔던 세월인 것”이라며 “그리고 변호사로써 국가를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이고 내가 기다리는 큰 바위 얼굴은 무엇인가를 줄곧 연구해왔고 이제 그 뜻을 펼치고자 하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면서 내가 해야 할 과제와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을 실현시키는데 전력을 기울려야 한다는 내 자신에 대한 부추김이 샘솟고 있다”며 “내가 그동안 내 자신과 싸우며 갈고 닦은 것을 갈무리하여 보다 큰일을 위해 내 소명을 펼쳐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주어진 일과 역할에 대해 최선을 다해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쳐간다”며 어려웠던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이 대변인은“생계를 위해 밭을 갈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을 넘어 배움의 길을 다녔던 ‘어린시절’,학비를 벌기 위해 남의집에 전전긍긍하며 살았던 고뇌와 시련의 ‘학창시절’, 그리고 군대생활 등 남보다 몇배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생긴다”고 털어놨다.
그리고“무료법률상담을 하기 위해 변호사로 더욱 분주하게 살았고 사회활동을 통해 보람도 느낀 소신에 찬 나날들이었다”면서“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결코 내 자신이 잘난 것이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변호사로 생활하며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도 강의를 했지만 결코 내가 잘나서라기보다 변호사로써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정체되거나 혹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욱 열심히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 여야 5당의 대변인들이 마포 “빈대떡” 모임에 참석, 열린우리당 우상호, 한나라당 이계진, 민주당 이상열, 민주노동당 박용진, 국민중심당 이규진 대변인들은 지난 6월22일 저녁 빈대떡 안주에 막걸리로 건배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나는 이제 내게 주어진 소명을 위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다”고 희망을 얘기했다. 독설의 대가 유종필 의원에 이어 대변인이 된 이 대변인은 민주당 내에서 신사로 통할만큼 지덕을 겸비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화갑 대표를 비롯해 민주당 의원단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며 원내 3당 대변인이 된 그는 17대 국회 들어 산업자원위원회 위원과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당법 및 정치자금법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민주당 기획조정위원장을 거쳐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았고 한. 러 의원외교협의회 회원과 한.아르헨티나 의원친선협의회 이사, 한. 사우디 아라비아 의원친선협의회 부회장 등을 맡아 외교 활동에도 힘썼다.
민주당이 5.31 지방선거에서 소위의 성과를 거두고 앞으로 불어닥칠 정계개편 속에 주도권을 주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의 여론 창구인 이 대변인의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