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회장 등 '석방 진단서'에 거짓 소견한 서울대병원, 구치소 관계자 9명 기소
서울대병원 의사들과 서울구치소 간부들이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 재소자들로부터 뒷돈을 받고 중병을 앓는 것처럼 진단서 등을 꾸며 구속 집행 정지나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날 수 있도록 해줬다가 검찰에 적발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 곽상도)는 최근 형·구속 집행 정지 관련 금품수수 비리에 대해 수사를 벌여, 뇌물수수 등 혐의가 잡힌 정 모(52) 전 서울구치소 의무과장 등 3명을 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알선수재 등 혐의로 이 모(67) 전 서울대 병원장과 이 모(53) 서울대 의대 교수, 정보근(40) 한보그룹 회장, 임 모(59) 전 서울구치소장 등 6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前 한보 회장, 서울대 병원장 매수
정태수 전 한보 회장의 주치의였던 이 전 서울대 병원장은 1999년 8월께 '한보그룹 불법대출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이 확정된 정씨가 고혈압 등을 이유로 형 집행 정지 신청을 할 때 정씨에게 유리한 내용의 소견서를 작성해 주고, 정씨 아들인 정보근 회장한테서 사례비 2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사고 있다.
정씨가 지난 99년 여덟번째 형 집행정지를 신청하면서 재판부에 낸 의사 소견서에서 이 전 원장은 고혈압과 당뇨 등을 앓고 있던 정씨를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곧 죽을 것'처럼 묘사했다. 변호사와 상의 끝에, 원래 소견서에는 없던 내용을 추가하거나 병세를 과장한 것이다.
이 전 병원장은 또 지난 2002년 5월 3천만원을 받고 제자인 서울대병원 오 모 교수를 통해 정태수씨를 서울대병원에 신속히 입원시키고 별도의 조직검사 없이 '대장암'이라는 진단서를 발부 받게 해 준 것으로 드러났으며 결국 정씨는 한 달 뒤인 6월에 석방됐다.
구속집행정지는 피의자가 중병, 근친의 관혼상제, 시험 등이 있을 때, 형집행정지는 재소자가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중병이거나 출산, 고령일때 거주를 제한해 일시 석방하는 제도다.
"수감생활 하면 급사 위험 있다" 과장
50억원을 배임한 혐의로 구속이 불가피했던 모 건설업체 사장 이 모씨는 서울대병원 이 모 교수를 매수했다.
이 교수는 2001년 8월께 배임 등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가 경찰서를 탈출한 뒤 심장질환이 있다며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자수한 이씨의 구속 집행 정지를 위해 1500만원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면 급사 위험이 있다"는 내용의 진단서를 끊어준 것으로 조사됐다.
덕분에 이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전 서울구치소 의무과장 정씨는 애초 이씨의 구속 집행 정지 신청에 "수감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취지의 진단서를 발부했으나, 이씨한테 2천만원을 받고 "뇌경색 증상이 나타나면 치명적 결과에 이를 수 있다"고 진단 내용을 바꿔준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관계자는 "결국 2002년 1월 구속 집행 정지로 풀려난 이씨는 같은 해 5월 추가 기소 등으로 재수감될 처지에 놓이자 병원에서 달아났다가 지난해 9월 검거됐다"며 "이씨는 도피기간 중 전혀 병원 치료를 받지 않는 등 건강이 양호했는데, 이는 이 교수의 진단서 내용이 크게 과장됐음을 방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치소 안은 더욱 상습적, 제도적 보안장치 필요해
구치소 안의 행태는 더욱 상습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 과장은 이씨 외에도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 수감된 이 모씨(71)가 구속 집행 정지로 풀려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준 대가로 2800만원 상당의 금품 및 부동산을 받거나 받기로 약속하고, '고속철 로비사건'의 김 전 경남종건 회장의 형 집행 정지와 관련해 1750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가 드러났다. 임 전 서울구치소장은 김 전 회장에게 외부병원에서 진료를 받도록 해 주고 사례비 950만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이들 9명 이외에 2002년 6월 구속 수감 중 신부전증을 일으키는 무좀약을 고의로 다량 복용해 구속 집행 정지로 풀려난 김아무개씨가 중국으로 달아난 사실을 확인하고, 인터폴에 국제공조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검찰 관계자는 "형.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기 위해선 '구치소 내 의료시설로는 치료가 어렵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켜야 하기 때문에 외부병원에서의 진료를 둘러싸고 브로커를 통한 불법청탁의 여지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또 곽상도 부장검사는 "대학병원 의사가 작성한 진단서는 그동안 권위를 인정받아 왔으나, 이번 수사로 특정 목적을 위해 과장·왜곡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진단서나 소견서 내용의 신뢰성과 정확성을 검증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이성심 기자 lss@sisa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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