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홍반장
[영화리뷰] ...홍반장
  • 이문원
  • 승인 2004.03.17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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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퇴보시키는 불발연속의 결정체
모든 장르는 진보하고 있다. 장르의 원칙을 깨어버려도, 장르의 형식을 비웃거나 무시하더라도, 심지어 제작상에 오류가 생겨 장르 원칙을 지키려는 본래 의도에서 멀어지더라도, 결국 이런 모든 시도들은 장르를 실질적으로 진보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영화제작상의 거의 모든 요소가 뚜렷한 의지없이 방치된 채 극악으로 치닫고, 기본 컨셉조차도 저급하기 이를 데 없어 적어도 장르의 진행방향을 정체시키며, 나아가 장르의 진행을 일정부분 '퇴보'시키는 케이스도 간혹 등장하곤 한다. 아마도 한국영화 사상 가장 긴 제목으로 꼽힐 듯한 강석범 감독의 데뷔작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은 한국에서는 그 역사가 짧다 볼 수 있는 '한국형 스크루볼 코미디'의 진행방향을 '퇴보'시킬 수 있는 위력을 지닌, 참담한 수준의 영화로 등장했다. "...홍반장"의 기본컨셉은 단순하다. 바로 스크루볼 코미디적인 요소와 순정만화적 감수성을 결합시켜 '멜로드라마틱한 코미디'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 그러나 "...홍반장"은 우습다기엔 어이없고, 감성적이라기엔 차라리 민망하며, 이 두 가지 방향성이 서로 녹아내리지도 않아 어정쩡한 무드가 끝없이 지속되고 있다. 영화시작 5분 뒤부터 결말이 예측가능한 구조적인 단순성과 진부함은 어차피 장르성에 천착한 케이스라면 종종 발견되는 오류이니 일단 넘어가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반장"은 이런 '천편일률적인 구조'를 영화제작의 다른 요소들로 극복할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일단 스크루볼 코미디의 중심을 이루는 대사 플레이를 살펴 보기로 하자. '날카롭고 재치있는 서구적 대사 플레이'를 이루기 위해 많은 영화들이 그간 '저지른' 숱한 시행착오와 어설픈 매칭을 수없이 접해왔건만, "...홍반장"처럼 안일하고 무책임한 케이스는 참 드물었다. 기이할 정도로 착 가라앉은 무드와 일상다반사처럼 등장하는 타이밍 불발, 유머감각 자체가 거의 없는 이가 써낸 듯한 유치하고 조잡스런 개그들이 영화를 뒤덮고, 때때로 이 두 사람이 과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어색하고 딱딱한 매칭도 등장한다. 이런 대사를 읊조리고 있는 '인물'들은 또 어떠한가. 열일곱살 짜리 소녀도 극복했을 법한 '할리퀸적 감수성'에 크게 기대고 있는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 뜬구름과 같은 소녀적 감수성을 여전히 간직한 채 '전문직'에 종사하고 '거물급 아버지'를 지닌, 마치 소녀들이 꿈꾸는 몇 가지 '환상'을 한 곳으로 모아놓은 듯한 '혜진'과 아픈 과거를 지닌, '혜진'이 부족한 부분만을 모조리 갖춰놓은 대체적 왕자님 '홍반장'은 근래 볼 수 있었던 가상캐릭터들 중 가장 애매모호할 뿐더러 짜증나는 것이었으며, 이 두 캐릭터가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 역시 '기계적'이라는 느낌을 넘어서 급작스럽고, 설득력이 전혀 없는 '이해불가능'의 상태로 휩쓸려가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최하의 센스로 구조되어 있는 상황과 인물들, 그것도 아이디어 부족으로 인해 동일상황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전개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영화의 페이스에 점차 동조되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기괴한 효과는 다름 아닌 두 극악스럽게 구성된 캐릭터를 맡은 배우, 엄정화와 김주혁의 개성적인 연기 덕택에 얻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기본 캐릭터 구성을 훌쩍 뛰어넘어 인물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이 말도 안 되는 싸구려 캐릭터들에 대해 동정심과 동질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있는 두 주연배우의 진솔하고 센스있는 연기는 아마도 이 영화가 지닌 유일한 장점일 것이며, "...홍반장"을 단순한 필름낭비 수준에서 가까스로 탈출시킨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어떤 영화들은 장르를 퇴보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영화들 역시 장르의 진보에 조금 변칙적인 방향으로나마 도움을 주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든데, 바로 '안티-테제'의 역할로서 이보다 더 나은 종류의 '사례'도 없기 때문이다. "...홍반장"은 절대, 다시는 되풀이 되선 안 될 최악의 인물구성과 구조구성, 편집 테크닉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 어떤 쓰레기 필름덩어리더라도, 배우가 결국 영화를 어느 정도 구원해낼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영화이기도 하다. 한 편의 '예술적 가능성'을 지닌 구조물로서도, 심지어 엔터테인먼트로서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홍반장"이 지니고 있는 '영화'로서의 의미는, 이 정도가 다 일 것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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