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호남민심 공략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단순히 정책 지원을 약속하거나 이벤트성 방문이라기보다는 예전에 부족했던 진정성을 보여주려고 하는 모습이다.
강재섭 대표가 9일과 10일 호남을 찾아 각종 지역 현안에 대한 애정을 보이는가 하면 사상 이례적으로 여당 소속 지사와 정책협의를 갖는 등 파격행보를 이어갔다. 특히 그동안 소장파들의 잇따른 요구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안했던 지도부가 지금까지의 호남 홀대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까지 하고 나선 것. 이같은 강 대표의 본격적인 호남 행보는 사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호남 정서를 등에 업지 않고 내년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 한나라당, 호남을 향한 구애작전 통할 것인가?
호남민심 자체도 과거 '反한나라' 정서에서 벗어나 한나라당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호남지역 '반여 정서'가 확산되면서 상대적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지역정가의 얘기.
호남에서는 한나라당이 원내 제1야당으로써 먼저 국책사업 및 정책적인 지원에 내심 기대감을 걸고 있는 눈치다. 이처럼 호남은 이번 강 대표의 호남 방문을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사실상 한나라당은 확실한 호남국책사업 지원 방안과 독자적인 호남 프로젝트가 없는 실정이다. '호남 구애'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탄환'이 없는 셈.
한나라당은 이번 강 대표의 방문을 통해 '여론 수렴'의 자리로 국한하고 있는 만큼, 실질적인 사업지원과 정책제안을 호남에 先제시하기는 희박하다. 때문에 호남에 대한 지원정책 부재로 '탄환' 없는 강 대표의 '호남 껴안기'가 자칫 한나라당의 '진정성'에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대선전까지 한나라당의 호남구애작전이 성공을 거둘지 주목된다.
◆ 강재섭의 파격행보, 정치권 술렁
강 대표의 호남 방문 이틀째인 10일에 이뤄진 대(對) 호남 공식 사과는 당 소속 의원들도 놀랄 만큼 전격적인 것이었다.
박근혜 전 대표 시절 호남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선결과제라며 소장. 개혁파들이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던 당 차원의 사과가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다.
박 전 대표가 2년 남짓 재임기간 호남을 자주 찾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겪은 고초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지만 강 대표의 공식사과와는 차원이 틀리다.
당 분위기가 이를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지역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탓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날 강 대표의 사과는 호남의 심장이자 열린우리당의 '근거지'인 광주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사과의 '격'과 공식성을 갖추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엿보였다.
강 대표는 "당대표로서 전신정당 시절부터 호남에 계신 분들을 섭섭하게 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한 뒤, 한나라당의 뿌리격인 민정당과 민자당, 신한국당 집권 시절을 거치면서 호남에 대해 잘못한 점을 일일이 지적하며 자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호남 복선화에 36년, 광주-목포간 도로 고속화에 17년이 걸릴 정도로 지역발전에 동서균형이 이뤄지지 못했고 호남 출신이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했으며 5.18 민주화운동을 통해 호남이 고통을 받은 점 등이 거론됐다.
강 대표의 대호남 사과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하는 형식을 갖춤으로써 일단 한국정치의 '고질병'인 지역대립 구도를 깨뜨릴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강 대표는 앞서 9일에도 여당 소속인 김완주 전북지사와 가진 정책협의에서 '새만금 특별법' 제정 문제에 대해 한나라당이 앞장서 내년 초까지 관철시키겠다고 밝혔다.
당 지도부는 또 전주상공회의소에서 지역상공인들과 만나 지역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눈 뒤 김제 복숭아농장을 찾아 직접 수확과 포장을 하는 등 민생체험을 하기도 했다.
강 대표는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듯 한나라당의 꾸준한 노력이 호남인들의 마음에 전달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7·11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취임한 지 한달만에 호남을 3번이나 방문하는 등 공을 들이고 있다.
◆ 한나라당 호남 구애작전, 당 안팎에서는 글쎄?
강 대표의 이같은 참회에 대해 민주당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면서도 "그 수준이 미미하고 표현도 인색하다"고 다소 불만을 표했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을 통해 "한나라당내에서도 호남에 대한 '참회 수준'의 사과를 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강 대표의 사과는) 이에 비해 너무도 소극적인 표현"이라면서 "구제척인 해결책과 지역균형 발전 대책이 제시되지 않은 점도 유감"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과거 공화당에서 민정당, 민자당으로 이어지는 30년간의 영남 중심의 군사정권이 호남을 경제적으로 소외시키고 인재 등용에도 차별을 가했다"면서 "(한나라당은) 호남사람에게 물질적, 정신적 상처를 준 엄연한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시정하겠다는 의지 표명이 있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나라당은 과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호남껴안기를 시도했다가 선거 뒤에는 호남의 핵심 사업예산에 삭감 지침을 내린 바 있고, 2004년도 정기국회 때 호남예산 삭감하고 영남예산 증액하라는 당의 지침이 발견돼 물의를 빚는 등 이중성을 보여 왔다"면서 "이번 한나라당 대표의 포괄적인 사과가 대선을 의식한 정략적 립서비스에 그치지 말고, 낙후된 호남의 발전대책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재두 부대변인도 이날 논평에서 "한나라당이 호남지역을 방문해 자치단체와 정책협의회를 갖는 것은 한나라당이 야당이 된 이후 처음으로 이례적이라고까지 평가하고 있고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의 호남민심잡기가 진정성이 결여된 또 한편의 깜짝쇼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강재섭 대표의 사과발언도 이같은 정치사적 의미뿐 아니라 당 차원의 내년 대선전략이 깊이 개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있다.
즉 한나라당이 대선 때마다 호남에서 거의 표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내년 대선에서도 반복될 경우 '지역구도'에 가로막혀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
여기에 '5, 6공당'의 부정적 이미지와 절연함으로써 대선국면에서 외연을 확대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박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 당내 대선주자들도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호남에 대한 반성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같은 공식사과만으로 한나라당이 실제로 호남 '표심'에 다가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 많다.
한나라당이 각종 당 인사에서 호남출신을 배려하고 호남을 위한 정책입안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호남에 대한 '참회'를 주장해왔던 원희룡 의원은 "당 지도부가 호남 문제에 있어 정치공학적 접근까지도 극복하겠다는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점을 감안, 한나라당은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의 30%를 호남 출신에 할당하고 호남 광역단체장들과 정기적으로 정책협의를 갖기로 하겠다고 밝히는 등 구체적인 호남 화해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 공든 탑의 높이는?
한나라당 소속 인사들의 호남폄훼발언도 문제가 됐지만 강 대표의 호남방문에 앞서서도 한나라당은 두 번의 대선패배에 대한 아픔을 와신상담하면서 호남에 공을 들여왔던 것도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2년 남짓 재임기간 호남은 17번이나 방문했고,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호남에서 인재영입을 위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또 호남을 배려하는 뜻에서 이번 당직개편에서 지명직 최고위원, 대표비서실 부실장 2명, 그리고 중앙당 각종 위원회에 호남인사를 대거 기용했다.
6월 30일 시장직에서 물러나 지인들과의 만남을 갖는 등 '4년만의 휴식'을 취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지난달 13일부터 이틀간 목포대 등 호남 지역 4개대 학생들과 함께 전남 무안 지역에서 농촌봉사활동을 벌였고 100일 민심대장정에 나선 손학규 전 경기지사도 그 첫 방문지로 호남을 택했다.
사실상 한나라당 대권주자 빅 3 모두가 호남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 전 지사의 경우는 경기도지사 재임 기간과 앞서 한나라당 소속 의원일 때도 광주 5.18묘역 참배와 호남에서의 체육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미 거부반응을 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희룡 전 최고위원의 경우도 호남폭설피해가 발생했을 때 광주에 내려가 직접 재설작업을 진두지휘 하면서 진정성을 보여왔다.
호남출신으로 23년간 당에 몸담으면서 광주서을 당원협의회 위원장을 맡아온 이정현 부대변인은 그동안 "당이 호남에서 진정한 지지를 얻고자 한다면, 호남의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리고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해왔다.
그는 또 "한나라당이 전국정당으로 거듭나고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수도권 단체장들이 나서 출신지를 의식하지 않는 '탕탕평평(蕩蕩平平)'한 공직인사를 해나가야 한다"고 제안, 호남인사 배려를 우선시 해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해왔다.
한나라당의 이같은 노력은 실장,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 실정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 5.31 지방선거에서 수도권 자치단체장 싹쓸이라는 결과물로 도출됐고, 호남인의 표심몰이에 위력을 느낀 한나라당은 지난 2번의 대선패배를 떠올리며 이처럼 공든탑에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 대권의 꿈 강재섭, 호남 잡으면 다음은 본인차례?
지난 3월 한나라당 내 잠룡으로 꼽혀온 강재섭 대표(당시 의원)는 "연말까지 개인 지지율을 10%로 끌어올리겠다"며 대권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그는 "지난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역의 여론을 감안해 이회창 전 총재에게 양보했으나 이제는 큰 정치를 해 나갈 것"이라며 "지난해 원내대표로 일하면서 당의 지지도를 40%로 올렸고, 원만하게 당을 이끌었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특히 "지금까지 큰 꿈을 가지고 정치를 해 와 책잡힐 일이 전혀 없다"면서 "다음 대선까지는 1년이 넘게 남은 만큼 그 사이에 더 많은 사건·사고가 생길 것이고 그 가운데 (내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그러나 6월 대권도전에서 당권도전으로 급선회, 7.11전대를 앞두고 "대선 승리와 파벌 없는 한나라당을 만들기 위해 화합의 용광로가 되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강 대표의 호남구애 작전의 성공으로 한나라당이 2007년 집권할 경우 강 대표는 대선 관리형 당대표로서의 성공여부를 떠나서 당내 탄탄한 입지를 얻게 된다.
어찌됐거나 이례적인 호남구애작전과 자신의 재임기간 단행한 대 호남공식사과 등이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치부돼 일말의 공은 강 대표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버티고 있었지만 2005년 원내대표로 있으면서 당의 지지도를 40%로 끌어올렸던 그이기에 이번 호남에서의 지지율 상승을 가져올 경우 '승부사' 및 '견인차'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다.
차기를 노린다면 강 대표로서는 충분한 여건 마련과 함께 가능성이 주어지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