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해 보이지만 실상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헌법>법률(국회)>명령(정부)>조례(지방의회)>규칙(지자체)’의 순서로 우위를 갖는 단순화된 구조다. ‘상위법은 하위법에 우선하고 하위법은 상위법에 위배될 수 없다’는 대원칙은 어떠한 경우에도 변함이 없다. 특히 상위법이 상세한 내용을 하위법에서 정하도록 위임하는 경우에 하위법은 상위법의 취지를 반드시 따라서 세부사항을 정해야 하고 이를 벗어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불이익을 가하는 조항의 경우에는 상위법에 반드시 명시적인 근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민선 지방자치 20년 시대를 맞은 요즘 일부 지방의회·지자체들이 이러한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최근 국무조정실과 법제처, 행정자치부 등이 지자체의 조례·규칙을 전수조사한 결과 상위법에 위배되거나 상위법 상의 근거도 없이 불이익을 가하는 조례·규칙이 전체의 7.4%에 달하는 6440건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조례·규칙 12개 중 1개는 엉터리라는 얘기다.
지방자치단체가 따로 국가를 만들지 않는 이상 상위법에 근거가 없는 조례나 규칙은 모두 원천무효나 다름없다. 물론 자치사무에 관한 부분은 지방분권의 원칙상 조례에서 나름 자율적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역시 상위법의 근간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웬일인지 지자체가 이러한 엉터리 조례·규칙을 바탕으로 규제를 가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는 별다른 걸림돌이 없다. 조례를 제정하는 지방의원들의 전문성이 국회의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실무 인력이 부족해 입법기능이 크게 떨어지는 탓이다. 더구나 비뚤어진 의사결정 구조 탓에 말도 안되는 조례·규칙이 특정 정당의 주도 하에 졸속으로 통과되기 일쑤다.
이같은 엉터리 조례·규칙으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해당 지역에 입주한 기업들과 주민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예를 들어 법령에서 A라는 사항에 대해 지자체의 조례와 규칙이 규정할 수 있는 범위가 규정돼 있는데 막상 조례·규칙에는 이 범위를 벗어나거나 법령의 취지와 위배되는 B라는 사항이 신설돼 법의 근거도 없이 기업이나 주민들이 추가된 규제를 적용받아야 하는 식이다.
실제 수 년 전 한 기초자치단체는 액화석유가스충전사업 허가를 구했던 주민의 신청을 조례상 제한선인 인구밀집지역 200미터 내에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가 망신을 당했다. 법원은 이 조례가 안전거리의 2배 내의 범위에서만 기준을 정할 수 있도록 한 액화석유가스법령을 위반해 임의로 안전거리를 정했다며 주민의 손을 들어줬다. 상위법을 위반한 조례로 인해 이 주민은 정당한 권리를 제한당하고 소송까지 치러야 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던 셈이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지자체와 지방의회의 야합으로 부당한 조례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는 지자체장이 지방의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 탓이다. 국회에서 행정부의 입장이 반영되는 법안이 발의되는 것과 유사한 구조다. 특히 지자체에서는 지방정부의 힘이 지방의회의 힘을 더욱 압도한다. 사실상 지자체장이 지방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되는 이유다.
문제는 굳이 법치주의 원칙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엉터리 조례·규칙이 남발될수록 지방자치에 대한 신뢰가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상위법에도 근거가 없는 부당한 조례와 규칙의 남발로 주민들과 기업이 입는 경제적·정신적 손해는 만만치 않다. 이는 지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땅에 떨어진 신뢰도는 각종 민원과 쟁송으로 이어지고,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자체의 업무 효율성도 떨어진다. 그리고 이는 다시 신뢰도 추락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트러스트’에서 “‘사회적 신뢰’는 거래비용을 줄임으로써 경제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경제적 자산‘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상대를 신뢰하지 못할 경우 진위여부 확인, 안전장치 마련, 법적 조치 등 다양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정신적 스트레스의 동반은 덤이다. 후쿠야마의 지론은 주로 경제활동에 관한 것이지만 지자체가 엉터리 조례와 규칙을 남발할수록 공공영역에서도 ’사회적 신뢰‘의 중요성이 부각될 태세다. 지자체의 규제 하나조차도 맞나 틀리나를 따져야 하는 세상이 올까 근심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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