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독자층을 확실히 흡수한 '샐러리맨 만화'의 대표작들을 살펴보자
이제 '만화는 어린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편견은 버릴 때도 되었다. 만화에 '미쳐있던' 어린 아이들이 점점 자라나면서 나이에 맞게 볼만한, 다양한 장르의 코믹들이 시장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실에서 대부분 봉급생활자, 즉 샐러리맨이 되어버리는 것이 '어린 아이'들의 운명이라면, 그들의 애환과 야망을 모두 담아낸 '샐러리맨 만화'가 넥타이에 양복을 끼워입은 그들의 '운명'을 달래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 '샐러리맨 만화'는 실제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성인코믹 형태이기도 한데, 만화의 왕국이라 불리우는 일본에서도 결정적으로 성인독자층을 넓히게 된 계기가 바로 야쿠자 만화와 샐러리맨 만화의 탄생이었다고. 이번에는 이들 '샐러리맨 만화' 장르 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들과 각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기업관을 바라보며 우리의 힘겨운 '직장생활'의 고충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는 계기를 갖기로 하자.
샐러리맨에게도 '소신'은 있다 - 히로카네 켄시의 "시마과장"
가장 대표적인 샐러리맨 만화이자, 이후 장르 자체의 방향성을 바꿔버린 작품이기도 하다. 가상의 회사 - 그러나 그 사명에서부터도 '모델'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인 '하츠시바 전산'에 다니는 평범한 샐러리맨 시마 코사쿠의 '직장생활기'를 담아낸 "시마과장"은 실로 대기업 생리와 권력투쟁, 음모와 모략, 중년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과장급' 샐러리맨들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애환과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주인공 시마 코사쿠가 여타 샐러리맨 만화들의 주인공 - 특히 한국 샐러리맨 만화가 더욱 그렇다 - 이 그러하듯 '출세지향적' 인간형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소신'을 중요시 여기며, 어느 파벌에도 들어가길 꺼려하고, 한 마리 고독한 늑대처럼 '회사'와 '회사인간'들 사이를 부유하며 여러 인간군상과 조직군상을 '탐구'해 나가는, 모종의 '회사 탐색자'의 입장에 서있는데, 그의 이런 소신이라면 소신, 우유부단이라면 우유부단한 태도가 많은 샐러리맨 독자층에 크게 어필하고 있는 것. 워낙에 '정쟁'을 즐기는 한국인들에게 시마 코사쿠의 아웃사이더적 기질은 얼핏 공감하기 힘들 듯도 하지만, 거대조직 내에서 위로 밟히고 아래에서 치이는 경험을 해 본 직장인이라면 누구라도 시마 코사쿠의 '소신있는' 샐러리맨 정신을 동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시마과장"의 대성공으로 인해 히로카네 켄시는 수년 뒤, 속편인 "시마부장"을 연재하기에 이르렀고, 이마저 성공하자 세 번째 시리즈인 "시마이사"를 연재하고 있어, 과연 시마 코사쿠라는 인간상이 일본 샐러리맨 사회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회사는 '행복한 곳'이어야 한다 - 다카하시 신의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의 주인공 키타노 유지는 실로 기이한 인간상이다. 현실성이라곤 전혀 없는, 절대로 공감할 수 없는 종류의 '극단적 이상주의자'이며, 지나칠 정도로 순수한 원론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를 통해 보여지는 '행복한 샐러리맨 생활'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통렬한 것이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굴지의 스포츠용품 회사에 입사한 키타노 유지가 드러내는 '회사'의 정체는, 그 다양한 열거만으로는 분명 현실성이 그득 - 성차별 문제에서부터 구조조정에 이르기까지 - 한 것들이지만, 이 모든 복잡하고 민감한 케이스들에 키타노 유지의 '이상주의'와 '원론주의'가 먹혀들어가고, 결국 모두가 웃으며 행복해진다는 식의 막무가내 행복론이 삽입되면서 "좋은 사람"은 더욱 기이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좋은 사람"은 한 마디로 '샐러리맨 환타지'이다. 그것도 "시마과장"과 같은 종류의, 일개 샐러리맨으로서 수많은 미녀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허리를 굽히지 않고 소신있게 행동하면서도 능력을 인정받다는 식의 환타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의 환타지, 즉 '모두가 알고보면 '좋은 사람'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회사는 잘 풀려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환타지인 것.
샐러리맨 생활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다카하시 신의 이런 '과격한' 발상에 코웃음을 칠 수도 있겠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이런 종류의 발상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오히려 키타노 유지보다 더 기이한 인간군상들이 몰려있는 곳이 바로 '회사'라는 공동이익추구 집단이었다는 생각에 조금은 우울한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OL도 분명한 사회의 일원이며, 꿈과 이상이 있다 - 카타오카 미사오의 "Good Job"
분명 성인적인 연애담만이 '레이디스 코믹'의 전부는 아니며, 사회로 진출한 많은 여성들을 위해 '여성용 샐러리맨 코믹'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레이디스 코믹'의 한계 안에 있는 것들이어서 회사 생활 그 자체보다는 회사에 다니는 여성의 '연애담'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카타오카 미사오의 "Good Job"의 경우, 거의 '연애 free'라고 여겨질 정도로 굳건히 '여성 회사원'들의 고충을 액면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Good Job"의 주인공 '우에'와 그의 동료들은 회사에서 잡무를 맡아보는 OL들. 멋드러진 계약건도, 엄청난 수준의 거래도, 승진과 야심, 자아성취의 기회도 모두 그들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 OL들은 여전히 꿈을 꾸며, 회사생활을 통해 자아실현에 이르려 노력한다. 실제로 "Good Job"의 한 에피소드에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단순업무'에 매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비하하여, 영어공부니 자격증이니 하는 것들로 남성사원들과 같은 경쟁에 뛰어들려 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며, 이런 이들에게 주인공 '우에'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단순작업'이 사실은 회사의 근간이 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OL 코믹인 "Good Job"은 오히려 '삶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일정부분 - 모토미야 히로시의 "샐러리맨 킨타로"같은 경우는 작품 전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 을 '환타지성'에 기대고 있는 여타 '남성용 샐러리맨 코믹'들에 비해 훨씬 더 성숙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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