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오너의 의지와 채권단의 판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채권단이 현대상선에 회생의 길을 열어줬지만 한진해운에겐 자구안이 미흡하다며 추가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배수진을 친 것이다. 무엇이 채권단이 추가지원을 할 수 없게 만들었을까. 국내 1,2위 해운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올해 이처럼 다른 길을 가게 된 원인은 2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다. 그룹 오너의 의지와 그룹 내 자산 매각을 통한 경영 정상화 여부, 그리고 채권단의 판단이 두 해운사의 운명을 가른 것으로 보인다.
한진해운은 국내 1위 해운사로 세계 7위의 영업력을 과시하며 수십 년간 해외영업망을 쌓아왔다.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의지로 1977년 컨테이너 전용선사로 출발한 한진해운은 1988년 대한선주와 합병하면서 ‘국적해운사’ 이름으로 불렸다.
해운업 호황으로 승승장구한 한진해운은 해운업 침체와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조수호 회장의 부인인 최은영 전 회장이 이끌다 2014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구원투수로 나서 한진해운을 이끌었지만 1조원 이상 그룹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해운업 불황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좌초위기에 몰리자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그러나 채권단과의 한진해운 자구안에 지원규모를 놓고 자금싸움으로 흐르면서 법정관리라는 최악의 수순으로 흘러갔다. 채권단과 한진그룹이 양보 없이 기싸움만 벌이다 글로벌 7위 해운사를 잃게 됐다.
◆그룹 오너의 의지가 문제?
반면 현대상선은 자율협약 신청 이후 용선료 협상이 최대 위기로 꼽혔지만 용선료 20%대 인하로 한고비를 넘기면서 경영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비록 현대그룹의 품을 떠나긴 했지만 채권단 품에서 현대상선은 새로울 출발을 하게 됐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이처럼 법정관리와 경영정상화 길이라는 엇갈린 길로 접어들게 된 배경은 그룹 오너의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다.
현대상선이 자율협약 신청 당시 전만해도 현대상선은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현대그룹은 1월 말 채권단에 추가 자구안을 제출했다.
자구안에는 현대증권 재매각, 경영권을 포함한 현대부산신항만 지분 매각, 벌크 전용선 사업부 매각 등이 담겨있었다. 이 외에도 3월 29일 자율협약에 돌입하기 전 2월 현대증권 공개매각이 시작되면서 KB금융지주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현대증권 지분 22.56%를 1조2500억원에 인수한다는 본계약을 4월 12일 체결하면서 매각대금을 현대상선에 투입 경영정상화에 힘을 보탰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외에도 현 회장은 300억원 사재 출현으로 경영정상화의 의지를 보여줬고, 용선료 협상 당시 용선료 인하를 강력히 반대한 조디악의 에얄 오퍼 회장에게“조디악은 과거에도 현대상선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힘을 빌려준 든든한 친구였다. 나는 물러나지만 현대상선을 꼭 좀 도와 달라”는 눈물의 편지로 극적 타결을 이끌었다. 용선료 20%인하를 이끌어 내면서 3년 5개월간 5천300억원을 아낄 수 있게 됐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최은영 전 회장으로부터 한진해운을 넘겨받은 뒤 경영정상화를 위해 1조원 이상 실탄을 쏟아 부으며 회생 의지를 펼쳤지만 해운업 불황이 발목을 잡았다. 한진해운 역시 채권단과 구조조정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지난 2월 삼일 회계법인을 선정하고 경영상황 점에 나섰다.
채권단도 현대상선과 달리 한진해운은 당장 어렵지 않은 것으로 파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삼일 회계법인을 통해 회사 전반의 상황을 판단한 결과 중장기적 관점에서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하면서 1조2000억원 자금 확보를 위한 자구계획안 마련을 요구했다.
4월 25일 한진해운이 자율협약을 신청하면서 한진해운 채권단은 조건부 자율협약의 조건으로 조양호 회장의 사재출현을 요구했다. 선례로 현정은 회장이 300억 원을 출연한 것에 따른 조치였다. 그러나 당시 한진해운이 제출한 자구계획안엔 오너 일가 사재출현 계획은 포함되지 않았다.
5월13일 한진해운은 해운동맹 ‘디얼라이언스’결성해 해운동맹 가입으로 한고비를 넘겼지만 채권단과 자금지원 규모를 놓고 4000억원 추가로 지원할 수 없다며 버티자 채권단은 7000억원 지원 없이는 채권단에서 지원을 할 수 없다고 줄다리기를 이어갔다.
지난 25일 하진해운은 채권단에 최종 자구계획안을 제출했지만 기존 자구안과 별 차이가 없다며 자구계획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각에선 조양호 회장과 한진그룹이 한진해운의 경영정상화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1조원 이상 투입했는데 자구계획안에 의지를 보여줬다면 채권단의 지원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진그룹 사정상 올해 당장 4000억원 이상 추가지원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채권단은 지난 30일 만장일치로 추가 지원은 없다고 결론 냈고, 한진해운은 다음날 바로 법정관리 신청을 냈다.
◆채권단의 판단이 운명 갈라
채권단의 판단도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운명을 갈랐다는 평가도 나온다. 현대상선은 채권단과 자율협약 과정에서 별다른 잡음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고비마다 채권단의 압박이 있었지만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의지와 자산 매각 등 자구계획안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면서 경영정상화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채권단은 현대상선이 마지막 관문인 해운동맹 가입이 난항을 겪으면서 자율협약 마감 시한을 넘길 위기에 처하자 7월 말까지 시한 연장 카드로 현대상선이 해운동맹에 가입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현대상선 이에 화답하듯 세계 최대 해운동맹인 2M에 가입하고 구주조정을 마무리했다. 채권단의 출자전환 조건을 모두 완수한 것. 8월5일 신주 상장이 이뤄지면서 현대상선의 부채비율은 5300%에서 400%로 떨어졌다.
40년 만에 현대그룹 품을 떠난 현대상선은 이렇게 경영정상화의 길로 가게 된 반면 한진해운은 법정관리에 들어가 청산절차 수순을 밟게 된다.
지난 30일 채권단이 한진해운에 추가지원은 없다고 사실상 사망 선고를 내린 이유는 한진그룹의 자구계획안이 기존 수준과 별다른 차이점을 느끼지 못한 점과 조양호 회장의 의지 여부라는 시각이 크다. 또한 당시 현대상선이 해운동맹 가입을 놓고 긴박한 상황에서 한진해운이 현대상선 해운동맹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금융당국과 채권단 심기를 건드린 게 지금까지 온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채권단이 한진해운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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