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간 스크린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100년간 스크린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 이문원
  • 승인 2004.03.27 14: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대와 의식 개혁에 따라 급격히 변화한 ‘예수 영화’의 면모를 살펴보자
종교란 분명 인간생활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고, '인간의식체계' 자체를 다루고 있는 문화예술계에 그 영향이 미치고 있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가장 영향력있는 신생 예술 장르인 영화에서 이렇듯 인간정신의 모체를 이루고 있는 여러 종교들 중 유독 '기독교',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신약'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 까닭은, 역시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기독교의 영향권 아래 있는 서구의 주도 하에 발전한 장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영화의 메카'로서 군립하고 있는 미국과 미국인들에 있어 신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그 탄생 시점에 근접한 무렵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해 필름 안에 새겨놓는 작업을 계속 해오며 그 '신앙심'의 기치를 올려왔는데, 그 모습이 시대의 변천과 의식의 변천에 따라 끝없이 변모해오며, 같은 이야기 내에서도 '쟝르'를 달리하며 해석해내는 흥미로운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번에는 이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을 시대변천에 따라 짚어보며, 과연 '인간의식의 혁명기'로 불리우는 20세기에 영화는 어떤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어 시대의 흐름을 반영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영화의 태동기, '그리스도'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신성을 띤다? 최초의 '예수 그리스도' 영화를 밝혀내기란 다소 어려운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세계 최초의 여성감독인 알리스 기의 1898년작 "예수가 본 빌라도"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탄생지인 프랑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탄생 4년'만에 등장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는데, 이후 프랑스 굴지의 영화사 '파테'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몇 편 더 제작해 - 이 중에는 알리스 기가 다시 메가폰을 잡은 "예수의 생애"(1906)도 끼어있다 - 큰 호응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아직 극영화 형식이 제대로 확립되지도 않은 시기이기에 '영화'로서의 가치는 다소 미흡하다 할 수 있다. 1912년에 발표된 시드니 올콧 감독의 "말구유에서 십자가까지" 역시 카메라를 정지시킨 채, 텍스트 사이사이에 간간히 '삽화' 형식으로 화면이 끼어들어가는 '타블로' 형식을 띠고 있어 아직 '영화'라는 형식으로서는 이렇다 할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음은 마찬가지이다. 이에 반해, '미국영화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D.W. 그리피스 감독의 '전설적인' 스펙터클 대작 "인톨러런스"(1916)는 보다 미학적으로 야심차고, 보다 분명한 영화적 형식성을 띠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영화의 효시'로서 언급해 볼만한 작품이다. 고대 바빌론과 예수 탄생시의 예루살렘, 16세기 프랑스 파리와 현대 미국의 4가지로 나뉘어진 섹션을 통해 시대와 장소를 꿰뚫는 '불관용'의 사례들을 대하 스펙터클로서 그려내고 있는 "인톨러런스"는 그 엄청난 프로덕션 디자인과 의상디자인, 광활한 영상으로 관객들을 압도시키며, 훗날 '블록버스터'의 효시로서 꼽힐 만큼 당시로선 '불가능'해 보이는 기획이었다. 이는 '예수'의 이야기가 훗날 '대하 스펙터클 엔터테인먼트'로서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동시대적으로도 여러 스펙터클 상업영화 작가에게 큰 영향을 주어, 세실 B. 드밀이라는, 영화사상 그 예를 보기 드문 '성서 스펙터클 작가'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반면 덴마크 최초의 '세계적 거장' 칼 테어도어 드레이어의 1921년작 "사탄의 책"은 무겁고 침울하게 진행되는 '종교적 예술영화'의 초기형태였다. 재치와 상상력으로 많은 걸작들을 발표한 드레이어로선 의외의 결과물로서 여겨지기도 하는데 - 물론 "쟌 다르크의 열정"과 같은 비슷한 예가 있긴 하다 - 그만큼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많은 작가들이 다루고 싶어하면서 그 무게감에 짓눌려 진중한 접근 외에는 불가능했던 '유럽적 압박감'을 대변하고 있다. 1900년대 초반에서 1930년대에 이르는 이 '그리스도 영화'의 초기의 작품들은 '예수'의 형상을 '배우'가 맡아 연기한다는 데 불경함을 느껴 손과 암시적인 이미지만으로 예수를 드러내는 효과나 가능한한 성서의 기본구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고집 등, 상당히 조심스런 접근방식을 특징으로 들 수 있는데, 이런 방식은 훗날 '보다 완화된' 분위기 속에서도 하나의 테크닉 - 분명 1959년판 "벤허"에서도 예수의 모습은 뚜렷이 그려지지 않는다 -처럼 사용되는 묘한 발전방향을 보여주었고, 스토리텔링을 중요시한 까닭에 모더니즘이 영화계를 점령하기 이전, 하나의 '모범적인 스토리텔링 텍스쳐'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례가 되기도 했다. 최초의 블록버스터 역할을 한 '대하 스펙터클 성서 이야기' '대하 스펙터클 성서 블록버스터'라는, 지금 들으면 거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영화 트렌드를 이야기하자면 먼저 앞서 언급한 세실 B. 드밀이라는 인물을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1910년대, 무성영화 시절부터 다작감독으로서 활약해온 세실 B. 드밀은 1923년, "십계"를 영화화하면서부터 '성서영화'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십계"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으로 인해 그는 "왕중왕"(1927)과 같은 그리스도 영화는 물론,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지닌 "십자가의 계시"(1932), "클레오파트라"(1934), "삼손과 데릴라"(1949) 등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는데, 이들 작품들은 이전의 성서 영화 스타일과 달리 광대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사치스런 의상, 인물보다는 배경에 포커스를 맞춘 촬영과 장쾌한 음악 등을 총동원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 버금가는 대하 스펙터클로 그 방향을 잡아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냈다. 그의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어서, 머빈 리로이 감독의 "쿠오바디스"(1951), 헨리 코스터 감독의 "성의"(1953) 등, 이른바 '세실 B. 드밀 스타일'의 아류 성서영화들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들 아류 작품들까지 모두 흥행에 성공하면서 '대하 스펙터클 성서 블록버스터'는 하나의 '경향'에서 '쟝르'로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다. 드밀의 영화 경력은 1956년, 무려 85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십계>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끝맺었는데, 그의 사후에 그가 '창조'해낸 성서 블록버스터는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하나는 '세실 B. 드밀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성서를 화려한 배경 하에 담아내는 작품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서와는 전혀 다른 픽션을 다루면서 드밀이 보여준 프로덕션 디자인과 의상, 촬영기법 등만을 취한 '대하 시대극' 장르였다. 전자의 대표적 예를 들자면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왕중왕"(1961),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1965) 등을 꼽을 수 있고, 후자에는 보다 더 '야심'찬 작품들, 즉 안소니 맨 감독의 "엘 시드"(1961), 조셉 L. 맨키비츠 감독의 "클레오파트라"(1963)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 '세실 B. 드밀 경향'의 후예들은 1950년대 초반에서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동안 관객과 비평계를 모두 잠식하다시피 할 정도로 강력한 '점령'을 이루어냈다. 이 작품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영화계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먼저 아직까지 종교단체의 문화적 영향력이 막강하던 시절이기에 '교회에서 추천한 영화'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등장했을 시, 그 선전효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또 대화 중심의 연극적 성격을 짙게 드리우던 헐리우드 기존 영화제작 형태에 염증을 느낀 관객들에게 보다 '시네마틱한' 경험을 선사해주는 장르로서 실제로 당시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로 꼽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보적인 색채를 유난히도 싫어하는 미국의 보수적 평단으로부터도 '좋은 영화'의 대표격 아이템으로서 고정된 호평을 얻어낼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추가될 수 있다. 새로 밀려들어온 동일한 경향,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영화'에서의 '그리스도 영화' 뉴웨이브는 1971년 초연된 앤드류 로이드 웨버-팀 라이스 팀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영화버젼과 같은 해에 초연된 뮤지컬의 영화버젼인 "가스펠", 두 편의 뮤지컬 영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의 삶과 그의 의지, 사랑, 분노를 현대적 시각으로 해석한 노먼 쥬이슨 감독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73)와 데이비드 그린 감독의 "가스펠"(1973)은 모두 뮤지컬 공연시와는 또 다른 거센 항변을 불러 일으켰는데, 거의 죠크에 가까운 이 새로운 시각에 처음 자극을 받고, 이를 다시 한번 스크린 안에 투영할 '배짱'을 가진 이들은 다름아닌 코미디 작가들이었다. 영국의 악동그룹 '몬티 파이손'이 총출동한 1979년작 "브라이언의 일생"은 '예수'와 '예수가 살던 시대'에 대해 거침없고 기관총같은 야유와 풍자를 날려보낸 작품이었다. '예언자'란 그 시대에 일종의 '직업'에 가까웠고, 대중은 정치적 목적과 정치적 방향성의 부재에 의해 '예언자'를 창조해내며, 따르고, 또 조종해낸다. 그리고 억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가짜 예언자' 브라이언의 옆에서, 예수는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your life'(항상 인생의 밝은 면을 바라봐야 한다)는 노래를 불러주며 그를 위로한다. 이 파격적인 코미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의 이야기가 지니고 잇던 모든 신화성을 파괴하고, 이것이 가장 '현실적으로' 벌어졌을 때에 어떤 딜레마와 아이러니가 생기지는 지에 대해 조명한 "브라이언의 일생"이 나온 뒤, 헐리우드의 코미디 대부 멜 브룩스 역시 "인톨러런스"의 코미디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세계의 역사, 제 1부"(1981)를 통해 '마지막 만찬'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에 대해 과격한 죠크를 일삼으며 '신화 파괴'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누벨바그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쟝 뤽 고다르마저 이 '예수신화 파괴'에 동참했다. 고다르의 1985년작 "마리아께 경배를"은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현대 프랑스로 옮겨와 농구를 좋아하는 소녀 마리아와 택시 운전사 요셉 사이에서 '신이 내린 아이'의 임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실제로 '신격모독'적인 성격이 있다기 보다는 다소 장난끼 어린 '현대화'의 시각 자체와 자주 등장하는 '마리아'의 누드 장면 등이 종교인들을 특히 분노케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런 대담한 작품에 대한 논쟁은 3년 뒤,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감독들 중 하나인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1988)을 통해 드디어 폭발해버렸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경향, 즉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부각시키는 작업에 전념을 기울인 작품이다. 예수는 과연 신의 아들인지 그저 과대망상증 환자인지 알 수가 없으며, 그의 '기적'들도 신의 축복인지 눈속임인지 알 수가 없다. 유다는 예수와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그를 배반한다. 그렇듯 시니컬한 설정 하에서도 스콜세지는 '신의 아들로서 살아간' 인물이라는 입장과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버려 결국 '신성'의 완성에 이른 인물이라는 방향으로서 예수를 다루고 있어, 이 시니컬한 시대에 가장 절절한 접근방식으로서 '예수'의 신비와 위대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은 결국 그 대담한 접근방식과 표현상의 문제 - 환상 시퀀스 중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정사 장면이 끼어있다 - 로 인해 '열화와도 같은' 비난을 한몸에 받았지만, 이 절대적인 '신화파괴'와 '종교적 본질추구'의 정신은 많은 씨네아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어, 이후 '그리스도'를 다룬 영화들은 대개 종교의 신성과 예수의 신화성을 파괴하고 대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서 기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아메리칸 뉴 시네마' 이전의 고전적 그리스도 해석 버젼은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나자렛 예수"(1977)나 스튜어트 쿠퍼 감독의 "A.D."(1985)와 같은 TV 시리즈로만 만나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