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에 묻혀있는 보물선, 70년 만에 그 진실 밝혀질듯
해저에 묻혀있는 보물선, 70년 만에 그 진실 밝혀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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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팀, 22일 본격적인 인양작업 후 한 달이면 윤곽 들어 날 것.
▲ 잠수부들이 바다속에 잠수하기 전 장비를 추스리고 있는 모습
▲ 작업전에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관계자들과 작업자들의 진지한 회의 광경
안마도가 소재한 영광군 낙월면은 조선시대에는 진월이라 불렸는데 1896년 지도 군에 편입되면서 낙월도로 개칭되었으며 191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광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인구수가 줄어 100여명이 살고 있는데, 추운 겨울에는 거의 많은 주민들이 육지에 나와 살기 때문에 언제나 조용한 곳 이지만 예전에는 1,000 여명의 인구가 살았고 마을도 다섯 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조용한 마을이 10여 년 전부터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로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11년 만에 새로운 공법으로 인양작업을 할 수 있는 방안이 거론되면서 그동안 노심초사 기다리며 애를 태워왔던 전남 여수의 L모씨(64세)가 최장 3개월의 작업 기간을 정해놓고 작업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45년 6월10일 해방을 2개월 남짓 남겨놓고, "일본의 민간인 화물선이 장항제련소(현 LS니꼬)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미 공군 폭격을 받고" 가까운 육지 부근에 정박시키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행하다 전남 영광군 낙월면 안마도 인근 바다에서 사망자 1명 포함 8명의 선원들이 내리고 바로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침몰선 인양에 대한 보도는 영광군에서 발간하는 지역신문에 보도되면서 각 언론사에 알려졌는데 당시를 소화 20년이라고 발표하면서 1920년으로 잘못 보도한 언론도 있었지만 나중에 시기를 1945년으로 정정 보도하기도 했고 MBC에서는 2009년 8월경 직접 잠수부를 동원하여 수중촬영을 한 후 미스터리 X-파일을 통해 전국에 10여차례 방송을 했었다.

아무튼 최초의 발굴자이면서 허가권자인 A씨는 전남 여수사람으로서 1995년 부터 안마도에서 어촌계의 사업을 도와주며 다수의 잠수부들을 거느리고 사업을 하는 수산업자였다고 하는데 이 침몰선에 젊음을 바쳤다고 할 정도로 미쳐있었고 모든 재산을 탕진하면서 이끌어 오다가 한계를 느껴 10여 년 전부터 L씨에게 허가권과 인양 권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침몰선 발견 당시 처음에는 수년 동안 안마도에서 사업을 하면서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나이 드신 주민들이 마을 뒤쪽 바다에 일본 화물선이 해방 바로 전에 폭격을 받아 침몰되어 있으니 잠수부를 시켜 확인해 보라고 했다는데 당시 침몰지점 인근에는 5가호 20여명이 살고 있었으며, 그 화물선은 군함 한척이 호위를 하고 오던 중에 미군의 폭격을 받고 급히 섬 쪽으로 새까만 연기를 쏟아내면서 닥아 온 후 얼마 안 되어 침몰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A씨와 L씨는 화물선을 찾기 위해 100여명이 넘는 잠수부들을 바다 속에 투입하여 여러 가지 자료들을 수집하게 되었는데 결국에 "침몰된 선박은 일본 광남기선 소속의 다도환이라는 887톤급 화물선으로 길이는 60M 폭12M 깊이 9M의 철선"으로 일본에서 국내나 중국을 들어올 때는 잡화를 실어 나르고 "일본으로 들어갈 때는 철광석 등을 싣고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인양작업을 시작한 2006년 10월달의 날씨는 100년 만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좋은 기상조건으로 작업하기에는 너무 좋은 여건이었지만 조금 시 마다 하루 1~2시간 진행해야 하는, 한 달에 두 번의 작업시간은 그나마 4~6일 정도로 짧아, 인양하는데 문제점으로 대두되었지만 세 번째 작업을 진행 하던 중 리프팅작업(뻘 제거작업)을 끝내고 올라온 작업자가 나무상자가 많이 있는 것 같다고 보고하여 오직 인양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다고 한다..

나무상자(30x50x80Cm) 존재 보고 후 순식간에 갑판위의 많은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작업자들이 선박 뒤쪽에 위치한 창고를 드나들면서 사과상자 크기의 나무판자를 가지고 나와 확인해 보니 고운 무늬에 반듯하게 대패질 되어 절반은 불에 타있는 것이 선명하게 나타나 폭격은 맞았구나" 하고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리프팅작업(뻘 제거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11월초 작업까지는 작업 시 제거했던 뻘이 다시 차오르곤 했지만 나무상자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너무도 쉽게 작업이 진행되었고 두 번째 조금 시 작업 때부터 상자를 인양하려는 시도는 이어져 갔는데 겨울철로 접어든 날씨가 애사롭지 않게 파도는 높고 추위와 강한 바람으로 인해 더 이상의 작업을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L씨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주위의 아는 사람들은 "물속에 상자가 있다면서 장비도 좋을텐데 그거 하나 못 건지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는데, 해저 40M 물속 사정도 모르면서 못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야속했다"라고 말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조류가 심하게 흐르는 바다에서의 작업은 철저한 준비와 확실한 장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6년이 지나고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2011년 해양수산청에 날씨 관계로 당분간 작업을 중지하겠다고 보고하고 3개월을 보내면서 작업 관계자들의 고충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충을 느꼈다고 하는데 주위의 시선과는 달리 우선 본인들이 알고 있는 "바다 속 선박의 창고에 있는 나무상자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궁금"하여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2011년까지 6년에 걸쳐 작업을 진행했지만 단순히 잠수부를 투입하여 원시적인 방법으로 고압세척기 등을 이용하여 뻘을 제거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고갈된 자금과 확실한 작업방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인양방법이 나오기 전까지 당분간 쉬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작업 팀장이었던 K씨에 따르면 바다 속에 침몰 되어있는 화물선은 실제로 선수가 일본 쪽을 향해 있으며 갑판위에는 크레인 작업을 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선수 앞에서 부터 약 30미터정도 3개의 화물칸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그 화물칸에는 뻘이 단단하게 가득차 작업조건이 너무 어렵다 보니 당시로서는 별 뾰쪽한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집행부들의 고뇌에 찬 얼굴들에는 실망의 빛이 어리기도 했지만 실망도 잠시 뒤로 미루고 협의 끝에 3개로 나뉘어진 화물칸을 추후에 탐사해 보고 난후 물건이 있으면 준설선을 이용하여 끌어 올린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2016년 3월부터 L씨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양방법이 나왔으니 인양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단층촬영을 하고 쏘나를 이용하여 촬영을 마치고 섬쪽으로 기울어져 침몰되어 있는 선박을 확인한 업체"들 중 경남 통영에 있는 S업체가 3개월 내 작업을 마친다는 조건으로 최종 계약을 체결하고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작업방법은 세 개의 화물칸 위에 헝클어져 있는 그물을 치우고 일부 잔해들을 들어내고 잠수부를 투입하여 수중촬영을 하여 선박상태를 확인한 다음 "그라브선을 이용하여 부분절단을 한 후 해체된 선체를 해상크레인을 이용하여 끌어올리겠다"고 작업을 전담한 S업체의 P씨는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작업 중간 중간 잠수부를 투입하여 실려 있는 화물의 실체를 확인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늦어도 금년 10월 중순경에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70년 전의 비밀이 세상에 공개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L씨는 말하면서 10년 이상 고생한 만큼 우리들에게는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면서 작업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했다

참고로 국유재산에 매장된 매장물의 발굴에 관한 규정을 보면 바다에서는 "허가권자가 80%, 정부가 20%의 지분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최근 파장 테스트를 하고 침몰선내에 "많은 금이 실려있고 은은 적게 동은 훨씬 많이 실려있다"고 판단한, 수원에 거주하고 있는 M모교수의 판단이 사실이라면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나 지난 1964년도에 한, 일 간 청구권협약에 의해 이미 일본은 한국 영해에 침몰된 선박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다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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