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근 "소녀연기"전
'소녀'의 이미지란 지난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 간 같은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린이와 성인의 사이, 옅은 여성성, 그리고 그 과도기적 양상만큼이나 불안정해 보이는, 심리적으로 와해해 버릴 듯한 위험성. 이런 고정적인 '소녀의 정형화'는 그 어떤 수정/보완 작업도 거치지 않은 채 현대 예술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왔는데, 1999년 '아줌마' 연작으로, 그리고 여러 영화의 포스터 작업으로 일반에게도 잘 알려진 사진작가 오형근이 펼쳐보이는 사진전 "소녀연기"는 이런 천편일률적인 이미지 - 그래도 '순수성'의 상징으로서 소녀를 다루는 시선보다는 진보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를 대중문화적 입장에서 재해석한 독특한 방향성의 전시이다.
연기학원 수강생인 여고생 70여명의 모습을 대형 흑백사진으로 담아낸 이번 전시는, '소녀' 그 자체로서의 모습이라기보다,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소녀를 '연기'하고 있는 소녀들의 모습을 철저히 해부하고 있다. 이들은 대중문화가 원하는 '소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들의 이미지는 모두 신비스럽고, 알쏭달쏭한 표정들과 사춘기 특유의 불안정한 도발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이미지들은 모두 '연기학원 수강생'이 '연기'해낸 이미지일 뿐, 이들의 '본성'을 꿰뚫어내는 '진실의 순간'이 아니다. 이처럼 지독히 냉소적인 작업을 통해, 오형근은 사회와 소녀와의 문제, 통념과 소녀와의 문제, 그리고 '대상물'로서의 소녀의 문제에 대해 다소 비관적이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서 있는 소녀들', '소녀와 여성', '졸업 앨범' 등의 세 파트 연작 형식으로 이루어져, 각 파트별로 '이미지'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교육시키며, 재생산시키는 연쇄적 상황을 날카롭게 풀어헤쳐 보이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꿰뚫고 있는 작업으로서 추천하고픈 전시이다.
(장소: 일민미술관, 일시: ∼200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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