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연말로 예상되고 있는 정계개편을 앞두고 새로운 키워드가 급부상하고 있다. 최근 정치권의 화두를 장식하고 있는 ‘대북 포용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한일 정상회담 직후 “대북 포용정책을 전면 재수정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과 한명숙 국무총리가 국회 긴급현안질의에서 햇볕정책의 실패를 자인한 것에서 이같은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대통령과 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바로 여당 내 반발의 대상이 됐고, 급기야 김근태 의장, 천정배 의원, 정동영 전 의장 등이 모두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결국 정가일각에서는 이를 기화로 여권이 ‘탈 노무현’을 선언하고 새롭게 민주개혁세력의 결집이라는 새로운 정계개편 기류를 형성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연말 정계개편을 앞두고 ‘태풍의 핵’으로 등장한 북한 핵실험 이후 여권 내 차기 대권주자들의 행보가 숨 가쁘게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여권의 ‘빅3’ 김근태 의장, 천정배 의원, 정동영 전 의장 등의 행보가 눈에 뜨이게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행보 빨라진 여권 ‘빅3’
특히 이중 당권을 지닌 김 의장의 거침없는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대권 발판 사업으로 추진해 왔던 ‘뉴딜’전략이 사실상 유명무실화되면서 위기에 처했던 김 의장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당내 구심점 역할을 재구축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기존 ‘위기의 남자’에서 ‘위기가 기회를 가져다준 남자’로 부상할 조짐이 보인다.
이와 맞물려 노무현 대통령의 포용정책 수정론에 대한 당내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게 뒷받침되면서 자연스럽게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도 부각되는 중이다.
북한 핵실험 사태 이후 김 의장은 ‘한반도의 평화가 최우선’이라는 반론 불가능한 주장을 소신으로 내세우며 당내 여론을 별다른 잡음 없이 정리해 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당 일각에서 “김 의장이 너무 빨리 가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황 주도력도 인정받고 있다는 후문. 이로써 다시금 ‘평화개혁세력 결집론’이 부상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여기서 김 의장이 탄력 받는 주요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명 노 대통령과 맞서고 있다는 점이 전체의 이유는 아니다. 이쯤 되면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 전 대통령이 노구를 이끌고 활발한 강연을 통해 강경론에 맞서며 ‘화해협력 정책’의 고수를 목놓아 외치고 있다.
북 핵실험 이후 야당의 강경론과 함께 노 대통령의 사실상 햇볕정책 관련해 백기 투항함으로써 촉발된 여당내 반발 및 햇볕정책지지 성향을 가진 의원들이 이런 김 전 대통령의 활약에 한껏 고무돼 더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 김 의장도 이런 케이스다.
기세가 한껏 오른 김 의장은 지난 12일 오전 당 북 핵 대책특위를 주도했다. 이종석 통일, 윤광웅 국방부 장관 등의 면전에서 “이번 사안에 대해 불성실하거나 안이한 태도를 보이는, (당과)상황을 긴밀히 협의하지 않는 공직자가 있다면 그에 대해 국민의 대표로서 합당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평소의 김 의장의 조용한 화법 위주의 스타일에 비하면 강한 경고성 메시지나 마찬가지 인 셈이다. 또한 한반도 핵 위기에 대해 여당의 수장으로 주도권을 잡고 해결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란 관측도 가능하다.
김 의장은 이어 이날 오찬을 개성공단 입주업체들과의 간담회로 이어갔다. 이날 김 의장은 정경분리 원칙을 확고히 하며 “개성공단에 과감한 투자를 한 여러분들이 후회하는 일 없도록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
그뿐만 아니라 김 의장은 조만간 개성공단을 직접 방문해 ‘남북합작사업의 계속 추진’ 의지를 밝히는 방안도 현재 적극 추진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위해 김 의장 측은 요로를 통해 북측에 방북 의사를 타진했고, 북측에서 부정적인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당국과의 협의만 이뤄지면 그의 방북이 조만간 실현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견지에서의 행보는 김 의장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같은 당의 천정배 의원과 정동영 전 의장도 동참할 태세다.
천 의원도 지난 11일 “북한의 핵실험 사태를 불러온 것은 포용정책이 아니라 참여정부 대북정책의 일관성 부족”이라고 노 대통령의 발언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이어 “미사일 발사를 이유로 쌀, 비료 등 인도주의적 지원을 중단하는 등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에 일관성이 부족했던 점이 남북한 신뢰를 가로막았고 결국 남이 북을 설득할 수단을 상실함으로써 북의 핵실험을 막지 못했다는 평가가 더 진실에 가깝다고 본다”고 밝혔다.
아울러 정 전 의장은 최근 북 핵실험 사태 해결을 위해 역할이 주어진다면 대북 특사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밝혀 이런 ‘DJ노선에 힘을 보탰고, 그만큼 예비주자간 경쟁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동영 전 의장은 지난 13일 핵 사태의 해법으로 북한과 미국이 마주 앉도록 해야 한다면서 당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정동영 특사론'도 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인정한 뒤 민주세력의 분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털어놔 정계개편의 가능성을 암시했다는 관측이다.
이러한 여권 내 예비주자들의 행보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북핵 문제가 경제 문제와 함께 내년 대선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당과 청와대 사이의 대북정책 온도차가 정계개편 과정에 미칠 직?간접적인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여권 한 관계자는 “북 핵실험 이후 당·청 간 균열의 틈새가 벌어지고 있다”며 “경협 및 인도적 지원 문제,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참여문제, 안보리제재 동참 문제, 북-미 직접협상의 요구 문제 등 정책사안들이 정계개편의 물줄기로 자연스레 흘러갈 전망”이라고 밝힌 후 “대북 포용정책기조의 유지 흐름이 하나의 정치세력화로 공고화될 가능성이 높고, 민주개혁세력 혹은 평화세력이란 이름으로 이들이 다시금 뭉칠 계기가 될 것”이라고 조심스레 내다봤다.
◆당·정간 균열 움직임
결국 오랜 기간 저공비행을 거듭해 온 여권 세력들이 북핵위기를 잘 풀어갈 경우 급부상 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脫 노무현’ 기류를 앞세워 당내 주도권 쟁탈전에 나선 여권 내부 ‘빅3’의 행보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