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단명 '비운의 대통령'이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고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지난달 26일 경복궁 앞뜰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2000여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거행됐다.
영결식은 최 전 대통령과 부인 홍기 여사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가 식장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군악대의 조악연주, 고인에 대한 묵념, 약력보고, 한명숙 국무총리의 조사로 진행됐고 불교, 기독교, 천주교 순으로 종교의식도 치러졌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조사를 통해 “현대사의 격랑 속에 대통령직을 맡으셔서 혼란한 정국을 국민과 더불어 감당하셨던 고인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고 슬프기만 하다”며 “외교업무를 맡으시던 그 시절 늘 `몸을 던져 어려움을 헤쳐나간다`는 헌신부난의 자세를 강조했고 그러한 태도야말로 이후 평생에 걸쳐 견지하신 엄정하고 성실한 삶의 지표였다"고 애도를 보냈다.
역대 12번째 국민장···국민들 애도
영결식이 끝난 이후에도 식장에 남아 있는 일반시민들이 많았다. 눈물을 흘리며 줄지어 영전에 조화를 건네는 시민. 행렬이 지나갈 때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는 시민. 다들 눈물을 글썽이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최 전 대통령의 국민장은 역대 12번째이며, 지난 1983년 아웅산 테러로 희생된 서석준 부총리 등 16명에 대한 장의행사 이후 23년 만이다.
국민장은 ‘국가원수의 직에 있었거나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은 자가 서거하였을 경우’에 장례의식을 거행한다. 국민장은 현직 대통령이 재임중 사망할 때 치러지는 국장 다음의 예우를 갖춘 것으로 5일장이 기본이다.
지금까지 국민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이시영·김성수·함태영·장면 전 부통령, 신익희 전 국회의장, 조병옥 전 대통령 후보, 육영수 전 대통령 영부인 등의 장례 때 치러진 바 있다.
회고록 통해 ‘현대사 의문’ 풀리나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격동의 5공 시대.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최 전 대통령이 과연 회고록을 작성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최 전 대통령은 지난 79년 10.26 사태 발발 직후 당시 국무총리을 수행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직을 수행했다.
이어 79년 12월 27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이때는 12.12 쿠데타로 전두환·노태우 등으로 대표되는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결국 신군부에 밀려 1980년8월15일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최단명으로 끝난 ‘비운의 대통령’이 됐다.
한 시민은 “최 전 대통령 이승의 마지막 길을 보기위해 행렬에 참가했다”며 “비운의 대통령이 회고록과 메모 등을 통해 격동의 시절을 기록해 놨을 것이다. 현대사의 의문점이 일부라도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 전 대통령 내외의 유해는 이날 오후 1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서 헌화와 분향, 조총, 묵념 등의 순서로 안장식을 치루고 합동 안치됐다.
전국 관공서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일제히 조기를 게양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로 영결식에 불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