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 재보선이 예상대로 열린우리당의 참패로 끝났다. 아니, 예상 그 이상이었다.
이번 재보선의 관심사는 국회의원 2곳. 인천 남동을에서는 이원복 한나라당 후보(57.7%)가 당선됐고 배진교 민주노동당 후보(18.54%)가 선전했지만 박우섭 열린우리당 후보(12.29%)는 3위로 밀렸다. 수도권 선거에서 민노당에 밀린 것은 역대 처음. 게다가 이곳은 원래 열린우리당 이호웅 전 의원의 지역구였다.
전남 해남·진도에서는 채일병 민주당 후보(62.53%)가 박양수 열린우리당 후보(29.25%)에 압승했다. 열린우리당은 수도권에서도 호남에서도 자기 텃밭을 깡그리 내준 것이다.
‘참패’는 예상된 것이었으니, 예상보다 나쁜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참패’보다 더 심한 낱말을 찾아 사전을 뒤져봐야 할 지경이다. ‘식물 정당’, ‘뇌사 정당’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재보선 전패를 확인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지난 10월 26일 “국민의 심판을 겸허히 무거운 채찍질로 받아들이고, 국민을 가르치려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언젠가 들어본 기시감이 있다면, 작년 4·30 재보선 이후 4차례의 선거 다음날 신문기사를 뒤져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선거에서 완패할 때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반복해온 고정멘트이기 때문이다. 성명서 쓰는 보좌관은 참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열린우리당, 사분오열
당초 선거 전부터 열린우리당은 이번 재보선의 의미를 축소하느라 애쓰는 모습이었다. 우상호 대변인은 “이번 재보선은 딱히 새로운 정치지형 변화를 드러내는 선거가 아니어서 책임론이 대세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 대변인의 말은 절반만 맞다. ‘새로운 변화’를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재’가 그대로 드러나리라는 것이 이번 재보선에 대한 지배적인 평가였다. 수도권·충청·영남·호남 각지에 선거구가 골고루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재보선을 통해 민심 이반이 확인된다면, 바로 그 타이밍에 국정감사라는 바쁜 일정이 끝난다. 일정에 여유가 생기면 그동안 거론되던 각종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실행에 들어갈 참이다.
재보선·국감 이후 열린우리당의 앞길을 두고 당 내부는 사분오열돼 있다. 큰 축으로는 김근태 의장·정동영 전 의장·천정배 전 법무장관 등 지도부와 중진들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신당론’, 참정연·의정연 등 친노직계를 중심으로 하는 ‘당 사수론’으로 나뉘어진다.
이 두 세력은 표면적으로는 ‘대선 필승’의 현실론과 ‘당 정체성’의 원칙론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동안 열린우리당의 당권을 두고 경쟁해왔던 ‘실용파’와 ‘개혁파’의 재대결이라는 점에서 이미 감정의 골은 깊다.
‘통합신당론’에는 호남 지역구 의원들이 대거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광주를 지역구로 하는 양형일 의원은 지난 10월 27일 <CBS>와의 인터뷰에서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후보자조차 낼 수 없는 집권여당이 과연 존재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라며 착잡함을 드러냈다. 염동연 의원 역시 “재창당과 리모델링은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양형일·주승용·우윤근 열린우리당 의원과 이낙연 민주당 의원의 사전접촉도 감지됐다.
반면 청와대는 지역구도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10월 26일 “노 대통령은 1988년 이래 지역구도에 맞서 싸워왔다”면서 “지역 분할구도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은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여기에 초선의원 23명으로 구성된 ‘처음처럼’이 지난 10월 26일 기자회견을 갖고 조기 전당대회와 ‘재창당론’을 제기했다. 민병두 의원은 “분명한 노선을 제시하고 정계개편을 이끌 세력으로서 실체와 명분을 국민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핏 친노직계의 ‘당 사수론’과 맥을 구분하기 어려운 논리다. 하지만 반대로 해석하면 ‘분명한 노선만 제시하면 통합신당을 추진해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동영계로 분류되는 민 의원은 처음처럼의 기자회견 다음날인 지난 10월 27일 홈페이지를 통해 “전당대회는 12월이 좋다”, “조기전당대회는 열린우리당의 해산과 관련된 권한을 위임받는다”, “3월까지 제세력을 포함하는 신당 창당”,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고건 전 총리 세력, 한나라당내 개혁세력, 시민사회 세력 망라” 등의 내용을 담은 글을 등록해 통합신당론의 구체적인 일정까지 제시했다.
친노그룹도 실용파도 아닌 김근태계로 분류되던 소위 ‘재야파’ 의원들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날 것으로 전망된다. 김근태계 모임인 민주평화국민연대 소속인 임종인 의원은 지난 10월 26일 홈페이지를 통해 “지지세력이 없는 정치공학적 판짜기는 옳지도 않고 되지도 않는다”며 ‘통합신당론’을 반대했다. 반면 최재천 의원은 “리모델링이라는 게 골조는 그대로 두고 바꾸자는 것인데 국민들이 용납하겠느냐”고 말해 통합신당론을 지지했다.
심지어 관료 출신의 보수 성향인 일부 의원들은 차라리 한나라당으로 이적할 가능성까지 논의되고 있다. “명분만 만들어주면 어디든 가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분위기다.
민주당, “열린당이여 오라”
호남에서 기세를 올린 민주당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분위기다. 재보선 다음날인 지난 10월 26일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정말 바빴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영결식도 있던 그날에 한 대표는 <불교방송>, <평화방송>, <KBS>, <CBS> 등 무려 5개의 방송 프로그램에 불려다니며 인터뷰를 했다.
이날 한 대표의 발언은 간단했다. “민주당은 열린우리당과 가깝다. 열린우리당은 정계개편을 시작하라. 민주당과 함께 가지 않으면 활로는 없다.” 노 대통령이 탈당하든지, 비노 그룹이 탈당하고 민주당에 합류하든지 일정과 방식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한 대표는 정계개편의 구심점이 고건 전 총리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견제를 늦추지 않았다. “과거엔 고 전 총리가 추대의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경쟁의 대상”이라며 “고 전 총리에 대한 문호를 개방했지만 체념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공천 잡음이 일었던 화순군수와 신안군수 선거를 바로 공천에 불복종한 무소속 후보들에 내주면서, 내부적으로는 지도부 책임론이 대두될 가능성도 이야기된다. 한 대표 역시 “전쟁에선 이겼는데 국지전에선 졌다”며 책임을 일부 시인했다.
이번 재보선에서 40%대 정당지지도의 확인과 함께 한나라당의 수확으로 호남에서의 선전이 꼽힌다. 당선한 후보는 없지만 전남 해남·진도에서 8.2%의 지지를 얻었다. 같은 지역구에서 17대 총선 때 한나라당이 얻은 득표는 1.7%가 고작이었다.
민주당에 기득권이 넘어가면서 고건 전 총리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아졌다. 고 전 총리는 지난 10월 26일 “지금이야말로 중도실용개혁세력의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지만 귀 기울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실체적인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는 무소속의 대거 당선을 높이 평가하면서 “기존 정치권이 아닌 새로운 정치세력을 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기존 정당이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될 세력에 후원을 보내달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러나 이번에 당선된 무소속 후보들이 기존 정당에서 공천에 탈락하고 독자출마해 당선된 후보들이라는 점, 특히 일부는 당선된 후 기존 정당으로 재입당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해왔다는 점에서 고 건 총리가 한 발언의 의미는 상당히 평가절하된다.
결국 고 전 총리에게 시급한 것은 구체적인 결단이라는 말. 고 전 총리는 앞으로 11월 ‘미래와 경제’ 전국 순회 세미나와 12월 ‘희망한국’ 경제 비전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밖에 뚜렷한 정치 행보나 세력 규합의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8.2% 지지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평가 속에 한나라당은 자못 흐뭇한 모습이다. 실제 선거기간 자체 여론조사에서 당 지지도는 꾸준히 10% 안팎을 기록했고, 지난 10월 언론사의 전남지역 조사에서도 7.3%를 기록해 민노당을 추월했다. 전남 화순에서도 5.19%를 기록했다.
이 분위기를 대선까지 이어갈지에 대해서도 상당히 낙관적이다. 한나라당 서진정책의 주역인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호남에서의 대중성도 상승하고 있고, 이명박 전 시장 역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한나라당의 호남 선전은 반노 정서의 영향이 크지만, 한나라당의 ‘인물’도 그 정서를 끌어들일 흡인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재보선에서는 이겼지만, 여당發 정계개편의 파장을 예의주시하는 모습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로 짜인 양강 대선구도에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김형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10월 2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열린우리당이 정계개편을 하려는 턱도 없는 수작을 한다면 국민에게서 영원히 버림받을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심재철 홍보기획본부장 역시 “여당이 판을 흔들려고 해도 힘이 빠진 상황에서 거기에 빨려 들어갈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민주노동당은 인천 남동을에서의 선전에 고무됐지만, 닥치는 내우외환에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분위기다. 북핵 유감 표명을 두고 당내 자주파와 평등파의 정파 갈등이 불거진 데다, 지난 10월 26일에는 ‘간첩단 사건’으로 최기영 사무부총장이 체포됐다.
한나라당, 호남 선전에 자축
10·25 재보선의 참패로 열린우리당의 내분과 해체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내년 대선을 대비한 정계개편의 흐름도 빨라지고 있다. 정계개편이 권력 투쟁에 눈 먼 야합이 될지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을지 향방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