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에 새를 그려 놓은 문신이 있으면 새를 잡는다고, 호랑이 문신이 있으면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몽둥이로 집중적인 구타를 당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목사)가 지난 10일 밝힌 삼청교육대사건 조사결과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인권유린과 가혹행위가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태도불량자로 찍힌 입소자들은 낮뿐만 아니라 새벽 취침시간에도 1시간30분마다 강제로 일어나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특히 여성들은 돌이 많은 연병장에서 머리를 땅에 박는 ‘원산폭격’을 하다가 정수리가 터진 경우가 많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계엄사령부는 ‘입소 직후 3∼5일간 공복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육체적인 반발과 저항력을 감소시키라.’는 교육계획을 하달했으며, 식당에는 ‘돼지보다 못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소보다 못하면 소고기를 먹지 말자.’는 구호를 붙인 것으로 드러났다.
구타 사망자 '자살' 처리 의혹
‘10·26 사건’ 이후 신군부는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80년 5월31일 비상계엄하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했다. 특히 ‘국민 기대와 신뢰를 구축한다’는 명목으로 ‘사회정화’ 작업을 추진했고 삼청교육대 설치도 그 일환이었다.
과거사위는 당시 계엄사령부가 권한을 남용해 ‘사회 개혁’을 추진했고 5·16 쿠데타 직후의 국토건설단을 참고한 점 등을 들어 정권을 창출하고 이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고 결론내렸다.
‘삼청계획 5호’에 따라 ‘계엄포고 13호’가 80년 8월4일 발령됐으나 군과 경찰은 이미 8월1일부터 80만명을 투입해 검거에 나섰다. 그 결과 81년 1월25일까지 총 6만755명이 법원 영장 발부 없이 붙잡혔다. 이들은 시·군·구 경찰서 단위에서 군·경·검 합심제에 의한 등급 분류심사를 거쳐 A, B, C, D 4등급으로 분류됐다.
A급은 군사재판 또는 검찰 인계, B급은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C급은 순화교육 후 사회 복귀, D급은 훈방조치를 각각 받았다. B, C급 등 순화교육 대상자는 입소한 군부대에서 재분류 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검거된 자의 35.9%가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과 달리 전과사실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 무분별한 검거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순화교육’은 B, C급으로 분류된 3만9742명을 대상으로 80년 8월4일∼1981년 1월21일 전후방 26개 군부대에서 11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이 중에는 중학생 최소 17명을 비롯한 학생 980명과 여성 319명도 포함됐다.
교육은 고된 체력훈련으로 유격 체조, 기초 장애물 극복, 땅에 착지하는 ‘공수 접지훈련’ 등이었다. 구타와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얼차려가 빈번했고, 특히 지시 불이행이나 태도불량자 등에게는 ‘잠 안 재우기’, ‘알몸 상태에서 물 붓기’, ‘문신 속 동물 때려잡기’ 등 온갖 인권 유린행위가 이뤄졌다.
군 과거사위는 "순화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진 삼청교육은 정당한 교육훈련의 범위를 넘어서는 반인간적 가혹행위이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시킨 행위"라고 평가했다.
혹독한 순화교육을 받고도 '미순화자'로 분류되면 전방 군 부대에서 근로봉사를 해야 했다. 이 인원만 1만16명이었는데, 이들은 도로 보수, 진지 구축, 통신선 매설 등의 작업에 투입됐고, 역시 구타와 얼차려가 일상적으로 자행됐다.
당국은 근로봉사의 불법성을 피하기 위해 '지원서'를 제출받았으며, 이른바 '순화 불능자'를 격리하기 위해 1980년 12월18일 '사회보호법'을 제정해 7578명에 대해 보호감호 처분을 내렸다. 보호감호 처분을 내리는 과정에서도 '부칙'을 통해 편법 처분을 내리는 바람에 재판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강제 수용돼야 했으며, 그 이후에도 기록이 경찰에 넘겨져 끊임없는 감시와 고통을 당해야 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삼청교육 사망자는 54명. 추가 사망자를 밝혀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54명의 사망자 중 일부는 기존에 알려졌던 자살이나 병사가 아닌 구타 등에 의해 숨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자살로 발표된 김정호 씨의 경우 1980년 8월7일 사건 초기에는 폭행치사가 사인인 것으로 보고 됐지만 5일 뒤인 12일 보고서에는 사인이 '자살'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군 과거사위는 '사인 조작'에 무게를 뒀고, 한상호, 신동훈, 유치일 씨 등 병사로 숨진 것으로 알려진 인물들에 대해서도 폭행에 의한 사망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군 과거사위는 "전문적이고 조사권한이 있는 국가기관에 재조사를 의뢰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정신적 피해 의료대책 필요
또한 군 과거사위는 "피해자가 겪고 있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실태 조사와 적절한 의료대책이 필요하다"며 "정부 차원의 공개사과와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지난 2004년 '삼청교육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국방부 산하에 위원회가 설치돼 보상 신청을 받고 있으나, 현재까지 신청자는 4600명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측에서는 "보상 법률안이 만들어졌지만 보상 신청을 해도 사망이나 상이에 대한 규정이 까다로워 기각되는 것이 태반이고, 보상으로 인정되더라도 보상금이 몇 십만~몇 백만 원 수준으로 너무 낮다"고 반발하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이 과연 이번엔 제대로 진실규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