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 이문원
  • 승인 2004.05.0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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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예술 형식이 가장 즐겨 차용하는 아이템 중 하나인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이번에는 영화 쟝르가 그m`
교권하락이니 학급붕괴니 하는 교육의 부정적 측면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요즘, 이제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만큼 할 말 많고, 뒷탈 많은 사회 이슈도 없을 듯 싶다. 하지만,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시대가 지나고 이제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 했던가? 무려 수십년 전에 만들어진 서구의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정확히 짚어내고, 또 그 해결책과 풀리지 않는 알레고리까지 훑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단순히 '교육 문화 후진국'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고 새로운 대립·갈등 구조를 추출해내는 진정한 '사회파 영화'의 후진국이라는 생각마저도 퍼뜩 들고 마는데, 이는 1990년대 후반 이후 벌어진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약진 이후에도 그닥 해소되지 않는 문제로서 여전히 우리에겐 한숨만 일으키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그간 서구 영화들이 수십년에 걸쳐 이 '교육 문제'에 대해 어떤 시각을 부여했는지, 교사와 학생 간의 미묘한 관계를 어떤 식으로 포착하고 또 어떤 종류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이 관계를 차용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 또 우리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교육현실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해 보기로 하자 절대적 교권의 상징, 아이들을 '바른 길'로 선도하는 열혈교사물 이 계통의 '아버지'격 영화라면, 단연 리차드 브룩스 감독의 1955년작 <블랙보드 정글>을 꼽아야 할 것이다. 불량 학생들이 교실을 통제하고 있는 학급에 발령받은 한 '열혈교사'의 사투를 그린 이 영화는 당시로서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데, '유치한 발상'에 의해 악행을 저지르는 학생들을 선도하고자 교사가 전선에 뛰어든다는 형식으로서, 진정한 '교사'와 '학생'의 대립구조라기 보다 '선인'과 '악인'으로 나뉘어진 서부영화의 흑백구조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브룩스의 공격적인 발상은 십여년 뒤 상업소설가로서 더 유명한 제임스 클라벨 감독의 <선생님께 사랑을>(1967)을 통해 훨씬 더 로맨틱하며 낙관적이고 애상이 넘치는 버전으로 채색되어 큰 상업성 성공을 거두기에 이르렀다. 이 영화 역시 '망가진 학급'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한 흑인교사(시드니 포이티어 분)의 사투를 담고 있는데, 학생들은 훠린 순박하고 성실하며, 결국 모든 아이들은 '이끌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뿐이라는 안전하고 안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우스꽝스런 '교화 주의' 역시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철퇴를 맞고 보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는데, 흑인 저소득층 타운에 교사로 부임했던 원작자 팻 콘로이의 실제 경험담을 토대로 한 마틴 리트 감독의 <콘랙>(1974)을 그 대표로 들 수 있으며, '흑인 사회 속의 백인 리더'라는 괴이한 구조는 이후에도 꾸준히 차용되어 <위험한 아이들>(1995)과 같은 무책임한 영화들과 <뮤직 오브 마이 하트>(1999)와 같은 '실화' 영화류로 이어졌다. '열혈교사'물은 1980년대의 <일어서서 말하라>(1988), <나에게 기대라>(1989)와 같은 실화의 영화화 이후 꾸준히 질적으로 저하되고 있는 상황이며, 1990년대에 등장한 동일계통의 <홀랜드 오퍼스>(1995) 등은 보수 관객층을 위한 '성인 저급 문화'의 일종 - 마치 '케니 G'나 다니엘 스틸처럼 말이다 - 으로까지 취급되었다. '교육 게릴라 선봉장', 혹은 기존 시스템의 개혁자로서의 '교사' 흔히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한 피터 위어 감독의 <죽은 시인의 사회>로 대표되는 장르이며, 보수계층과 진보계층을 모두 만족시켜 줄만한 '협의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대대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계통의 작품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점은 상당히 놀라운데, 대부분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상류층 프렙 스쿨'이라는 아이템만을 차용했을 뿐 '개혁적 교사'의 이야기에 대해선 별반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영화로는 딱딱하고 제도화되어 있는 군인들에게 셰익스피어를 가르친다는 페니 마샬 감독의 <르네상스 맨>(1993), 마이클 호프먼 감독의 '절대적 유사품' <엠페러스 클럽>(2002) 등을 들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영향권 안에 들어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개혁적 교사'의 이미지가 스크린 안에 비춰진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황규덕 감독의 1990년작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가 그것으로, '키팅 선생'처럼 책을 찢고, 책상 위에 올라서라는 식은 아니어도 분명 서구와는 전혀 다른 고민, 어찌보면 더 절대적이고 육중한 고민을 안고 사는 한국 고등학생들에게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부여하는 역할이 극중 교사에게 맡겨졌었다. 이 계통의 작품들을 서구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실제로 서구의 민주화된 학교 시스템 내에서는 '개혁할 꺼리'가 별로 없다는, 그야말로 부러운 교육상황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으며, 그나마 간혹 등장하는 동일 부류의 영화들도 엄격하기로 소문난 '특화된' 학교인 '상류층 프렙 스쿨'과 1960년대 이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점으로도 이런 주장을 힘을 얻고 있다. 아이는 '절대자'에 대항하며 성장한다, 교사와 학생의 격투극 실제로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를 다룬 영화들 중 가장 인기있고, 그 수도 많은 '대표격'에 속하는 부류가 바로 '교사와 학생 간의 완벽한 대립상황'을 묘사한 영화들이다. 이 계통 영화들 중 '클래식'을 꼽으라면 초현실적 묘사를 통해 '권력과의 맹목적 대결구도'를 설정한 린지 앤더슨의 걸작 <만약...>(1968)이 될 것이며, 근원지를 찾자면 당연히 장 비고의 1933년작 <품행제로>에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영화들은 모두 작가 개인의 소년시절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인생에서 제일 처음 맞이한 절대권력에 대한 분노'를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풀어내고 있으며, 때문에 드라마성이 강한 영화들이라기 보다 '사회파' 영화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이런 '분노'는 1980년대에 이르러 'MTV'와 접목된 알란 파커 감독의 <핑크 플로이드-더 월>(1981)을 통해 폭발하였으며, 이후 등장한 존 휴즈 감독의 <페리스의 해방>(1986)에서는 교사를 '학생의 자율적인 환기를 방해하는' 절대적 시스템의 신봉자로, '포스트-호러'의 악동 케빈 윌리엄슨이 써낸 두 편의 각본 <패컬티>(1998)와 <팅클 부인 가르치기>(1998)는 교사를 '외계인에게 세뇌당한 허수아비'와 '어릴 적 상처로 인해 성격파탄자가 된 희생자'로 그리는 등, 더욱 과격하고 모욕에 가까운 묘사들을 서슴치 않고 있다. '교사'에 대한 분노는 아시아에서도 폭발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확보된 것으로 잘 알려진 일본에서는 이미 1980년대에 일련의 '반골' 중학생들이 창고에 숨겨진 '탱크'를 몰고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회시스템에 항거한다는 스가와라 히로시 감독의 <7일 간의 전쟁>(1988)을 비롯, 수많은 '반체제 학생 영화'들을 탄생시켰으며, 그 절정은 '교사'를 위시로 한 사회체계와 학생들 간의 '진짜 전쟁'을 묘사한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배틀-로얄>(2000>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렇듯, 현재에 이르러서는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으로까지 '타락'을 경험하고 있는 계통이 바로 '교사와 학생 간의 전쟁' 테마이지만,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이런 발상을 '위험하고 지나치게 도발적인' 것으로서 간주하고 꺼리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 정반대편에 선 영화들도 간혹 나와 더 큰 '충격'을 주기도 하는데, 한 정의로운 교사가 살인까지도 서슴치 않는 불량학생들을 전기톱으로, 화염방사기로, 그리고 밧줄로 목을 매달아 하나씩 살해한다는 내용의 마크 L. 레스터 감독작 <클래스 오브 1984>(1982)는 이 계통의 흔치 않은 작품이자 가장 파렴치한 종류의 '데카당스 엔터테인먼트'로, 현재에 이르러서는 모종의 '컬트' 취급을 받고 있는 중이다. 교사도 사람이다, '교사'라는 직업의 아이러니와 고충에 대한 고백 '교사'의 문제를 '교육'의 차원과 별개의 것으로 보고, '개인적 고충'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잇는 작품들도 다수 있다. '교사'라는 직업이 지닌 자기헌신적 이미지에 현대인으로서 당연히 겪을 수 밖에 없는 탈선적 딜레마들이 맞닿아 '인간의 이중성'과 '인간으로서 겪을 수 밖에 없는 다원화된 고통의 구조'에 대해 탐색하는 이들 영화들은 대개 사색적 경향이 짙은 아트 성향의 작품들과 드라마성을 강조한 작품들로 나뉘어지는데, 대표적으로는 노처녀 여교사의 '방황'을 그린 폴 뉴먼 감독의 걸작 <레이첼, 레이첼>(1968)과 낮에는 장애아동을 돌보는 교사로, 밤에는 밤거리를 헤매는 헤픈 여자로 살아가는 여성을 통해 '현대인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리차드 브룩스 감독의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1977)를 들 수 있다. 농아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청각 장애인 여인과의 아슬아슬한 사랑을 다룬 <작은 신의 아이들>(1986)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 지명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여, 이들 '개인적 차원에서의 교사의 고충' 테마는 상당한 설득력과 호응도를 보여줄 수 있음이 입증되었으며, 이후 등장한, '한 명의 개인으로서의 일종 부류의 학생을 경멸할 수 밖에 없는' 교사의 딜레마를 다룬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일렉션>(1999)과, "능력없는 자가 가르친다"는 현대금구처럼 자신의 제자들을 질투하는 문학교수의 이야기를 다룬 <원더 보이즈>(2000) 등도 모두 열광적인 비평적 호응을 업고 '걸작'의 반열에 들어서기도 했다. 이들 작품들은 교육구조 내에서 학생들만이 피해자가 아니라, 일방적인 '모범'이 되어야 하는 교사의 입장 또한 피해의 영역에 이미 들어서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이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교사야말로 가장 독특한 인물 탐구가 가능한 '직업군'으로서 '교사'라는 직업을 차용하고 있는 셈이다. 진짜 교사는 아니지만...아이들을 '가르치는' 또다른 스승들 어찌보면, 위에 언급한 여러 교육구조의 아이러니와 딜레마 내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들 '또다른 스승' 부류인데, 얼핏 '개혁적 교사'의 이미지와 흡사하지만 실제로 교육 구조 내에서는 '파격'을 행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지하고 대체방안으로서 '과격한 교육 체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이 부류이기도 하다. 이 부류의 작품들은 대단히 인기가 많고, 대개 드라마성이 강화된 구조를 지니고 있어 일반인들의 흡수도와 보수계층의 호응도가 상당히 높은 편인데, 은둔한 소설가가 학교의 편견 가득한 문학교사를 대체한다는 <파인딩 포레스터>(2000), 풋볼 코치가 인종에 대한 편견을 제어시키고 아이들을 단합시킨다는 <리멤버 타이탄>(2000), 심지어 '가라데 고수'가 '왕따' 학생에게 자신을 지키는 법과 인생의 의미를 가르친다는 <베스트 키드>(1984)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과 범위를 제한하기 힘들 정도다. 이들 '대체적 교사' 류는 현재 교육 시스템 자체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대부분 '발전적인 방향'으로서 희망을 전달하는 '교훈적' 테마가 주를 이루며, 여기서 조금 엇나간 경우로는 자신의 피조물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피그말리온' 전설에 입각한, 시골처녀 귀부인 만들기' 프로젝트를 다룬 조지 큐커 감독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마이 페어 레이디>(1964)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심하게 나간 케이스로는 액션 스타 척 노리스에게서 인생을 배운다는, 정말이지 기괴한 테마를 지닌 아론 노리스 감독의 <사이드킥>(1992)까지도 포함되어, 이미 장르의 데카당스는 확실히 이루어지고, 또 다른 보수계층의 '성인 저급 문화' 일종으로서 자리잡을 소지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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