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궁중음식 명예보유자 故 황혜성 선생
조선왕조 궁중음식 명예보유자 故 황혜성 선생
  • 문충용
  • 승인 2006.12.16 1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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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마지막 대장금, 故人이 되다

한 평생 궁중음식 연구와 전승에 온 힘 쏟아
우리음식 뿌리 끝까지 지켜···무형문화재 등극



▲ 고 황혜성 선생
우리나라 궁중음식계의 큰 별이 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명예보유자인 황혜성 선생이 14일 낮 12시30분께 노환으로 별세한 것. 향년 86세.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지난 1920년 충남 천안생인 고인은 일본에서 여학교를 졸업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넘어와 1942년부터 30년간 조선왕조의 마지막 주방상궁인 한희순 선생으로부터 궁중음식 조리법을 전수받아 왔다.

그 후로 지금까지 한평생을 궁중음식 연구와 전승에 힘써온 것이다. 특히 고인은 1971년 종로구 가회동에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해 우리 음식의 신기원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전통 궁중음식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궁중음식 조리법을 계량화했으며 후계자들에게 실제로 조리법을 전승하는데도 앞장섰다.

1972년 문화재 관리국 식생활분야 문화재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올해 8월 조선왕조궁중음식 명예보유자로 인정받았기도 했다.

황 선생의 가족은 모두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녀 한복려(59.궁중음식연구원장), 차녀 복선(57.한복선식문화연구원 원장)씨도 요리연구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장남 용규(48. ㈜지화자 대표이사)씨와 3녀 복진(전주대 문화관광대학 학장)씨도 음식관련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지난 8월 4일 문화재위원회(무형문화재분과)의 심의를 거쳐 황 선생을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의 명예보유자로 인정했다고 밝혔다.


조선왕조궁중음식 명예보유자
명예보유자로 인정된 황 선생은 평생을 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승을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다해왔다.

그러나 고령으로 인해 기력이 쇠약해진 까닭에 명예보유자로 인정함으로써 그의 업적과 명예를 존중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전승체계의 활력을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황 선생은 지난 1973년 조선왕조궁중음식의 보유자로 인정된 이래 조선왕조궁중음식의 전승 보급 및 후계자 양성에 헌신해 왔다고 한다.

그는 1944년부터 조선조 마지막 주방상궁인 한희순 상궁에게 궁중음식을 전수받기 시작해 약 30년 간 궁중음식 조리법을 전수받았다.

이를 통해 궁중음식을 계량화하고 조리법을 정리해 궁중음식 관련문헌을 조사 연구했다. 즉 궁중음식문화에 대한 학문적인 배경과 실제적인 조리법의 전승에 힘써 왔던 것이다.

그는 일제 강압기에 사라져 가는 우리음식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궁중음식 기능을 전수해 우리 음식의 뿌리를 지키는 데 일조했다.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리 궁중음식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음식문화를 자랑하는 조선왕조궁중음식의 우수성과 품위를 널리 알리는 데 홍보대사 역할을 한 것이다.

지난 2005년도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명예보유자 인정제도는 평생을 우리 문화유산을 위해 헌신해 온 보유자들의 명예와 앞으로의 활동을 보장해 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전승자들 간의 안정적인 세대교체와 아울러 전승현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실효성을 목적으로 마련된 제도로서 문화재청은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이는 또 다른 황 선생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이다.


그의 삶은 오직 궁중음식뿐

1942년 스물 셋에 숙명여전 가사과 교수가 된 황혜성은 조선왕조 마지막 주방상궁 한희순을 만나 궁중음식 조리법을 전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한다.

충남 천안의 천석꾼집 응석받이 늦둥이 딸로 태어나 일본 교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일본 유학생 출신 한병덕과 갓 결혼을 한 때였다.

그러나 당시 순종의 왕비 윤비의 거처였던 창경궁 낙선재의 부엌 문턱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넘기가 쉽지 않았다.

황 선생은 매일같이 음식을 가르쳐 달라고 했고 어렵사리 그 정성에 감복한 한 상궁이 그의 청을 받아들였지만, 이는 30여년 한결같은 그녀의 궁중음식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그 복원은 힘들었을 것이다.

황 선생은 당시 스승이었던 한 상궁의 ‘손짐작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계량 단위’로 바꿨다. 물론 한 상궁의 ‘손짐작법’은 계량기보다 정확했지만, 이는 당시로서는 또 하나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즉, 황 선생의 열정이 아니였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10여 년간을 향토음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안동장씨의 음식 디미방으로 알려진 ‘규곤시의방’을 발굴해내기도 하고, 가장 높은 곳에 차려진 궁중 음식과 가장 낮은 곳에 차려진 향토 음식이 결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

하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도 우리 궁중음식에 대한 인식은 문화재청 사람들에게도 일천한 것이어서 스승 한 상궁의 무형문화재 지정(제38호)은 사망 1년 전인 71년에야 제자 황혜성의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15년간 성균관대 교수직을 역임한 후 궁중음식 제2대 기능 보유자로서 황혜성은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의 음식문화 비교연구, 궁중음식연구원 등 음식 조리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 한복려·복선·복진 세 딸도 모두 음식 연구가로서 한국에서 보기드문 음식일가를 이루고 있다.

황 선생의 저서로는 ‘李朝궁정요리 통고’, ‘궁중음식’, ‘생활요리’, ‘한국의 미각’, ‘가정학원론’, ‘한국요리 백과사전’, ‘가정요리 카드’, ‘한국음식’, ‘향토음식’, ‘가정요리 교실’(전8권), ‘한국의 요리’(전4권), ‘전통의 맛’, ‘장 담그는 법’, ‘열두 첩 수라상으로 차린 세월(회고록)’ 등이 있다. 또한 국민훈장목련장, 보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후진양성에 더욱 애쓴 황 선생
단아한 몸가짐과 조리 있는 말투로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궁중요리를 소개했던 황 선생.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고인은 숙명여대, 서울대, 명지대, 한양대, 성균관대 등에서 후진 양성에도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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