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박사'를 둘러싼 신비와 미스테리의 향연
'동방박사'를 둘러싼 신비와 미스테리의 향연
  • 이문원
  • 승인 2004.05.12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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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환상여행"
미셸 투르니에의 이름이 최근 들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거의 매해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기에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주목을 받는 부분도 있지만, 최근 어느 정도 '논의'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대중들 품으로 안착한 '프랑스 문학'의 대표주자라는 '국지적 입장'이 더해져 더 큰 관심과 호응의 대상이 된 듯 싶은데, 이번에 새로 발간된 <미셸 투르니에의 환상여행>은 고도의 지성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투르니에가 성서적 아이템으로서 쉽게 치부되고 마는 '동방박사'의 이야기에 대해 명백한 진실, 얽혀있는 전설, 성서적 입작, 그리고 작가적 상상력을 결합시켜 전혀 새로운 종류의 문학 형태로 꾸며내는 독특한 작품이다. 그의 천재성을 단박에 증명해내고 있는 이 책에서 투르니에는 '동방박사'에 대해 가히 편집증적일 정도로 세세하게 파헤쳐 들어가고 있다. 과연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바쳤던 동방박사는 몇 명이었을지, 그들이 예수의 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었던 '지표'인 별은 과연 금성이었을지, 화성이었을지, 그리고 그들이 아기 예수에게 바친 금, 유황, 몰약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에 대해 자세하고 재치있게 설명해 나가면서도, 사랑에 빠진 왕 가스파르와 예술에 빠진 왕 발타자르, 설탕의 왕자 타오르의 이야기를 덧붙여내어 새삼 문학의 형태로 이끌어내고 있다. 이는 경외 성서와 구전에서만 전해지는 '네번째 동방박사' 타오르를 추가시켜 기존의 '성서적 이야기'에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서, 신화성과 종교성, 역사성, 문학성을 함께 뭉뚱그려 놓아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든 뒤, 가장 문학적인 방식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엮어내 감동적이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철학성을 부여시킨 독창적인 작업이었던 것. 그러나 투르니에는 단순히 '흥미로운 형식의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낸 것에 만족할 만한 작가가 아니며, <미셸 투르니에의 환상여행>은 이 여러 복합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이야기 속에 현대에 대한 고찰과 비판을 더해 풍자문학적 성격까지도 부여해내고 있다. 바로, 메로에의 흑인 왕 가스파르와 백인 여자 노예 사이에서 펼쳐지는 열정적 사랑으로 현대의 '흑백 갈등'에 대해 은근슬쩍 묘사하고 있으며, 독점적인 사랑의 욕구와 자유로운 사랑의 환희를 번갈아 비추면서 '권력'에 근거한 현대적 갈등구조가 기본적으로는 '감정' 또는 단순한 '욕망'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투르니에는 이 시점에서 감동적인 대사로 모든 갈등의 근원을 풀어낼 만한 코드를 제시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며 그가 기뻐하는 장면을 보고 내 안에서 생기는 기쁨이며 그가 행복해 하는 것을 알고 느끼는 행복입니다. 사랑이란 즐거움의 즐거움, 기쁨의 기쁨, 행복의 행복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동방박사와 헤로데 대왕> 중에서) 또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니푸르의 왕 발타자르의 이야기에서는 예술과 종교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히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복합적인 탐구와 해석을 통해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구분되곤 하는 모든 종교의 가장 큰 문제, 즉 인간과 신의 '대화'는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 신에 대한 인간의 불복종은 어떤 식으로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 색다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신의 형상'과 관련에 이야기한 대사 역시 다시 언급해 볼 만하다. "나는 형상과 모습의 화해, 즉 숨겨진 모습의 재생 덕분에 다시 태어난 형상을 찾았습니다. 나는 정신에 의해 변모된 육체, 즉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미미한 소리를 내고 향기가 나는 육체를 경배했습니다. 육체만큼 예술적인 것도 없으니까요. 눈, 귀 혹은 손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육체가 저주받은 동안 내내 육체와 함께 저주받았습니다."(<동방박사와 헤로데 대왕> 중에서) 그리고 마지막, 새롭게 끼워넣어진 외경 성서와 설화의 주인공, 망갈로드의 왕자 타오르의 이야기는 마치 동양종교에서의 '고행의 여행' 개념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는 여러 동방박사들의 여행 목적 중 가장 경박한 동기인 터키 과자의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여행길에 나섰지만, 단절, 고통, 신체 훼손, 통과 의식, 의생, 죽음, 그리고 재생에 이르는, 마치 <화엄경>에 등장하는 어린 나그네 선재가 겪는 '깨달음'의 고행길과 같은 과정을 거쳐 아기 예수에게 이르게 된다. 그는 베들레헴에 너무 늦게 도착하여 아기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모든 부하와 노예들에게 자유를 준 뒤 사탄의 도시 소돔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의 몸과 삶을 타인에게 바쳐 최초의 성찬에 초대받고 하늘나라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런 '무소유'의 의지와 '해탈'의 이미지는 가장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찌보면 가장 오소독스한 기독교 형태에서는 기본적인 구도로 드러나있어 기독교의 동양 원류설에 박차를 가해주고 있는데, 어찌됐건 투르니에는 이 타오르의 에피소드를 통해 결국 '종교적 해탈'로서 여행길을 마무리짓는 결론을 통해, 이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틀을 깔끔하고 깊이있게 끝마치고 있다. 보통 유명작가의 신간서적이 그 작가를 대표하는 경우를 맞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책의 경우, 투르니에의 최고 걸작은 아닐지라도, 그의 가장 핵심적인 '장기'를 보유하고 있기에 적극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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