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하류인생
[영화리뷰] 하류인생
  • 이문원
  • 승인 2004.05.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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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 '하류' 스토리텔링
'국민감독' 임권택을 작가로서 분류하기란 여전히 까다로운 일이다. 자신이 쓰지 않은 각본, 지나치게 자기 개성이 강한 촬영감독, 특별한 자기 주장없이 보편타당한 주제만을 지니고 영화만들기를 계속하고 있는 이 늙은 장인에게서 작가적 특질을 찾아내기란 숨은 그림 찾기 퍼즐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텐데, 그럼에도 그가 영화구성의 기본인 스토리텔링의 명확한 구축에 일관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 정도는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임권택을 분석하는 일조차도 사실 버겁게 그지없다. 바로, 임권택은 뚜렷이 '즐겨 사용하는' 스토리텔링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2,3 편 정도를 같은 방식으로 풀어낸 뒤 다시 이를 '포맷'하고 새로운 형식 - 그렇다해서 독창적인 형식이라는 얘긴 아니다 - 으로 2, 3편 정도를 만들어내어 꾸준히 구조적인 변화를 주는 일을 반복해왔기 때문. 이를테면,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전반까지는 담담하고 정석적인 구조를 사용해오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는 비교적 느리고 침잠되며 동일상황 반복적인 구조를, 그리고 90년대 초반부터는 방대한 이야기 속에 잔가지 에피소드들을 빼곡이 채워놓는 구조를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임권택의 99번째 작품 "하류인생"은 전작 "취화선"에서 처음 선보였던 '번개처럼 빠른 스피드'의 에피소드 전개방식으로 프로타고니스트의 '삶' 그 자체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기이한 스토리텔링 구조를 다시 한번 답습하고 있는 영화이다. 여기서 미리 언급해 보자면, "하류인생"은 끔찍스런 영화이다. 근래 들어 가장 불쾌하고 불편한 영화체험들 중 하나라고 단언할 수 있으며, 하나의 완성된 영화를 보았다는 느낌조차도 들지 않는 졸속작에 속한다. 그리고 이런 지독한 감흥의 원인 중 상당부분은 스토리텔링 구조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는데, 같은 구조를 지닌 "취화선"의 경우,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가 빛날 수 있었던 핵심요소가 바로 그 독특한 스토리텔링 방식에 있었기에 이런 기현상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만 할 부분일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걸까. 실존인물의 삶을 영화로써 그려내는 방식은 생각 외로 꽤나 정형화되어 있다. 인물의 일생을 담아내기엔 영화 장르의 속성 - 주로는 관객이 버텨낼 수 있는 상영시간과 받아들일 수 잇는 정보량의 한계에서 발생한다 - 에 비추어볼 때 무리임에 분명하고, 결국 다루고자 하는 인물의 인생 중 어느 한 부분,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주제적 요소가 밀집되어 있는 한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삶 전체를 조망해내는 방식이 '전기영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취화선"은 이에 정확히 대치되어, 미친듯한 스피드 - 전개 속도로 보았을 땐 가히 마이클 베이급이라 할 수 있다 - 로 프로타고니스트 장승업의 삶을 한꺼번에 두 시간 남짓한 영화 속으로 우겨넣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색다른 감흥을 주었다. 마치, "취화선"의 영어판 제목이었던 "Stroke of Fire"처럼, 영화는 '불꽃처럼' 살아간 한 화가의 일생을 날렵하고 바쁘게, 찰나의 연속처럼 다루어내었고, 비로소 형식이 주제와 일치되어 상승효과를 일으켜내는 보기 드문 쾌거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하류인생"이 다루고 있는 '태웅'의 삶은 '열정적인 자세'라는 점에서 장승업의 삶과 언뜻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본질을 띠고 있다. 태웅은 장승업처럼 세상의 이치나 통념과 관계없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밟아나간 인물이 아니라, 정반대로 세상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려는 '시대설명적' 인물에 속한다. 그는 시대를 알려주기 위해 등장한 인물, 정확히 말하자면 인물이라 할 수도 없는 모종의 가이드 역할인 것이다. 태웅에겐 명확한 개성이 없고, 비하인드 스토리가 없으며, 내적인 비밀이 없다. 그는 몸으로 달려가며 시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 방식이, 불행히도 시대를 설명할 준비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다. "하류인생"의 광적인 페이스,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해 불현듯 이야기를 마쳐버리는 형식은 직선구조의 이야기 속에서 '빼낼 수' 있는 함유의 활용을 철저히 방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하류인생"이라는 영화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영화인가까지도 의아하게 만든 셈이다. 1950∼1970년 사이 '깡패들의 삶'을 그리는 시대인류학적 보고서라 보기엔 디테일이 턱없이 부족하고, 한 인간이 시대 상황 속에서 '혼탁'해져 가는 모습을 담아냈다 보기엔 인물 구성이 어설프고 기계적이며, 막연한 노스탈지아 자극성 영화라고 보기에도 로맨티시즘이 부족하고, 시대에 대한 관조적 시선이라 보기엔 거리감 설정이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결여' 내지는 '부족함', '미숙함'의 근원에는 절대적으로 스토리텔링 구조에서의 오류가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구조적 설정 이외에도, "하류인생"은 임권택 영화가 별다른 이유없이 꾸준히 고수하고 있는 단점들을 고스란히 들어앉히고 있다. 특별히 강렬하지도 독특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솔직하지도 않은 인본주의적 사상의 딱딱한 언급과 노스탈지아와 자기연민의 중간 정도로 채색되는 시대적 시선, '1960년대 문학'적 리얼리티만을 간신히 확보하고 있는 인물들과 결국 그 인물들의 '현실성'과 '진실성'을 무참히 깨어부수고 마는 인위적인 설명적 대사들이 영화 가득 채워져 있고, 이야기의 매무새가 흐트러질 만큼 흐트러져 있을 때, 인물의 얄팍함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마네킹같은 인물들끼리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척하는 광경이 짜증나기 시작했을 때에 이르면, 평이하게 연출해낸 다찌마리 장면들이 길고 지루하게 쏟아져 내린다. 영화가 시간이 흐를수록 망가져가며 종국에는 60년대 다찌마리 영화 공식에까지 휘말려 자가중독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하류인생"이 내세우고 있는 주제인 '영혼의 혼탁'이 관객들 머리 속 그득히 안개처럼 피어오름을 느낄 법도 한 일인데, 이쯤되면 21세기에 이르러 우리가 임권택이라는 감독을 과연 어떤 존재로써 받아들여야 할 지를 점검해봐야 할 시점에 이른 듯도 싶다. 임권택은 분명히 그의 긴 커리어 중 어느 시기에, 당시 한국영화 현실에 비추어보아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감독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모든 면에 있어서 시대에 뒤쳐지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이 되었을 뿐이며, 뚜렷한 작가적 개성의 결여는 결국 그로 하여금 '자신의 구식 이야기를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구식 작가' 정도의 타이틀조차 얻기 힘들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는 늙은 장인, 감각이 쇠퇴한 기능공, 판단력이 흐려진 영화기술자이며, 이제 우리가 그의 신작에 대해서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져야 할 '의무'는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그럼에도 임권택은 꾸준히 영화를 만들 것이다. 마치 비슷한 종류의 시행착오를 끝없이 반복하면서도 이를 근원적으로 개혁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 어쩌면 찾을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 영화 속 태웅의 모습처럼 말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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