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새벽의 저주
[영화리뷰] 새벽의 저주
  • 이문원
  • 승인 2004.05.21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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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가 인간조건 탐구로 바뀌어버린 까닭은?
CF와 뮤직 비디오계에서 '영웅' 취급을 받았던 잭 스나이더가 얼마나 뛰어난 비쥬얼 스타일리스트인지는 "새벽의 저주" 오프닝 시퀀스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가혹한 폭력묘사와 잔인한 유머를 자유자재로 뒤섞어 광기, 무질서, 아이러니의 혼합상태를 표현해낸 "새벽의 저주" 오프닝 시퀀스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탁월하게 구성점 사이의 교착점, 해소의 타이밍을 구사해내고 있는데, 문제는 이 '쇼케이스'가 끝나고 난 뒤부터 시작된다. 일단, 조지 A. 로메로의 원작 "이블 헌터"와 그 리메이크인 "새벽의 저주"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부터 들어보자. "이블 헌터"는 풍자 영화이다. 내용과 형식상 '호러'라는 장르에 기대고는 있지만, 1970년대에 등장한 장르 영화가 종종 그러했듯 - 대표적 예로 로버트 알트만의 "기나긴 이별"(1973)을 들 수 있다 - 장르성에 천착한다기 보다 오히려 장르가 지닌 고정적 일면들을 이용하여 '풍자'의 도구로 삼고 있는 것. "이블 헌터"는 현대사회의 소비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이자, 소비주의에 의해 '뇌가 침식되어 가는' 대중심리를 야유하고 있는, 그것도 가장 구역질나는 말초적 폭력 묘사로써 속사포처럼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대담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새벽의 저주"는 호러라기 보다 스릴러에 가깝고, 인간 조건과 실존에 관한 의문을 담고 있는 다소 무거운 톤의 '휴먼 드라마' 변종 스릴러에 속하며, 이 차이는 단순히 '방향성이 다른 리메이크'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영화 구조와 설정의 모든 면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작용하고 있다. 먼저, '왜 쇼핑몰인가'를 생각해보자. "이블 헌터"에서 '쇼핑몰'이라는 무대는 그 자체로 주제와 직결되는 설정이었다. 점령하고 있는 소수의 인간들과 '어떻게 해서든' 들어오려 하는 수많은 좀비들, 그리고 이를 탈취하려 하는 또다른 인간들이 한 데 뒤얽힌 아나키스틱한 '스플랫스틱' 쇼의 무대 '쇼핑몰'은, 현대 소비사회의 상징이자 집결체로서, 또 극흐름에 가속과 흥미를 배가시키는 기능적 장치로서 모두 성공적인 설정이었던 것. 그러나 "새벽의 저주"에서의 '쇼핑몰'은 제한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팽팽한 드라마를 가능케 하는 장소, 가깝게 보면 '"다이 하드"적 설정'이고, 멀리 보아도 기껏 '재난 영화적 설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새벽의 저주"의 무대는 굳이 '쇼핑몰'이 아니어도 된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나카토미 빌딩이어도 좋고, 새로 지어진 초고층 빌딩, 거대 선박, 추락하는 비행기 안이어도 좋다. 좁은 영역 내에서 인물들끼리 연극적으로 부딪혀 갈등하고, 미로같은 구조 속에서 쫓고, 쫓기는 자가 양분되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 현대 소비사회 풍자라는 방향성은 21세기에 이르러 낡아빠진 구석이 없지 않고, 이를 다시 한번 들려주기 위해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어딘지 무의미한 일인 듯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벽의 저주"가 제시한 방향성이 '더 동시대적'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이 정도 수준의, 얄팍한 실존적 갈등 묘사와 인간 조건에 대한 탐색은 이미 너덜너덜해질 정도가 되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는 '장치적 주제'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렇다면 결론은? 결국 수많은 리메이크 영화에 따라붙는 똑같은 멘트를 덧붙이는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즉, "이블 헌터" 역시, 리메이크될 필요도 없고, 리메이크되어서도 안 될 영화였다는 것. 그러나, 이렇듯 꽤 큰 방향성의 오류와 '존재 이유'의 모호함을 안고 있더라도, "새벽의 저주"가 엔터테인먼트로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오리지널의 다소 키치적인 프로덕션 디자인을 그대로 옮겨오는 착오를 범하지 않고, 주제에 걸맞게 고딕한 느낌으로 탈바꿈시켜 어두침침한 '인본주의 말살극'을 성공적으로 디자인해낸 점이나, 스릴러 영화 구조의 태피스트리같은 정교함과 스플래터 영화가 보여주는 단발마적 폭발성을 잘 혼합한 연출력 등은 냉정히 생각해보아도 상업영화로서의 합격점을 이미 훌쩍 넘어서있다. 그리고 이 즈음에서, 왜 광적인 연출로 뿜어졌던 풍자가 냉철한 연출의 인간조건 탐구로 바뀌었는 지에 대해 작으나마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1970년대와 달리 21세기는, 거친 영감보다는 정교한 테크닉이, 논란적인 야유보다는 대중적인 웅변이 더 잘 먹혀 들어가는 시대이며, 이런 '사고의 데카당스'가 비즈니스적 측면과 만났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이상론'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슬픈 현실 인식이 바로 그것일테다. 그리고 "새벽의 저주"는 이런 '이상론'의 예시와도 같은, '핵심'이 빠져있는 '잘 만든' 영화의 대표적 케이스로 불러워 질 법하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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