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허구' 사이의 벽 무너뜨리기
'현실'과 '허구' 사이의 벽 무너뜨리기
  • 이문원
  • 승인 2004.05.2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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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
전세계적으로 폭넓은 팬층을 지니고 있는, 그리고 특히 젊은층에게 열렬한 '신봉'을 받고 있는 작가 폴 오스터의 신작 <신탁의 밤>이 출간되었다. 그의 전작 <환상의 책>이 출간된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등장한 이 책은, 폴 오스터의 복잡하면서도 신비로운 세계를 '연타'로 날려 독자들의 뇌리와 감성대를 강타해 버릴 수 있을 법한, 그리고 많은 면에서 <환상의 책>을 능가하는 면모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폴 오스터는 늘상 자신의 작품에서, 현대 젊은이들이 그렇게도 열광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반복해서 다루고 있다. 기존의 사고방식들이 서로 충돌하며 생겨나는 부조리, 부조화, 불협화음. 그리고 이 모든 아이러니의 중심에는 '우연성'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우리의 삶은 의지와 행동, 계획의 연속체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찮은 우연과 우연이 체인처럼 맞물려 절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탈선한 폭주기관차와도 같다는 주장이 모든 폴 오스터 문학의 '핵심'이다. <신탁의 밤>은 이런 '우연성에 근거한 아이러니'의 주제를 어느 소설가의 책상 위로 옮겨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어느날 브루클린의 한 문방구에서 포르투갈제 파란 공책을 산 이후로 편집증적 집착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닉 보언'이라는 허구 인물의 생애를 쓰게 되며, 이 때부터 모든 상황이 '폴 오스터적 미로'로 빠져들게 된다. 시드니 오어가 창조해낸 주인공 닉 보언은 이야기 속에서 이 책의 제목인 <신탁의 밤>이라는 책을 읽게 되고, 결국 폴 오스터가 쓴 시드니 오어의 이야기 속에서 오어는 닉 보언의 이야기를 쓰고, 보언은 이야기 속에서 실비아 맥스웰이 쓴 <신탁의 밤>을 읽게 되며, <신탁의 밤>은 르뮈엘 플래그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식이다. 마치 영화 <성난 황소>의 엔딩 시퀀스에 대해 마틴 스콜세지가 언급한 멘트, 즉 "마지막 장면에서 로버트 드 니로는 테리 말로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 말론 브란도라는 배우를 연기하고 있는 제이크 라 모타를 연기하게 된다. 이 복잡한 상황을 해결하려면, 어찌됐건 가능한한 냉정하게 연기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멘트가 생각나는 부분인데, 오스터 역시 이 복잡하게 뒤얽힌 현실과 허구 사이의 구조적 미로를 가능한한 냉정하고 차분하게 묘사함으로써 비슷한 복합구조 플롯이 일으킬 수 있는 많은 혼란과 딜레마에서 빠져나가게 되었다. 여기에, 오스터는 주인공 시드니 오어와 그의 아내 그레이스, 아내의 대부이자 선배 작가인 존 트로즈의 캐릭터를, 오어로 하여금 자신의 소설 속에서 닉 보언, 로사 라이트먼, 에드 빅토리라는 인물에 각각 투영시키도록 이끌고 있다. 이 첨부 설정에 의해, 오스터는 소설의 주제인 '현실'과 '허구' 사이의 얇다란 장벽이 이미 무너져내린 상황, '허구'가 '현실'로 옮아오고, 또 우리가 강하게 믿고 있는 '현실' 인식이란 사실 '허구'적 상황의 숨은 반영일 수 있다는 대담한 주장을 흥미롭고 재치있게 풀어낼 수 있게 되었으며, 엄청난 사고의 미로와 상황의 혼합을 통해 이르는 '종착역'이자 '결정체'로서의 결론에 자신의 그 어떤 작품들보다도 더 유쾌한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해내었다. 폴 오스터 문학이 우리에게 매번 알려주는 '비젼'이 있다. '복합적 사고를 통한 진리 추구'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둡고 무거우며 침잠된 '고통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마치 '모험'을 떠나듯 가볍고 두근거리는 발걸음으로 차근히 밟아나갈 수 있는 '홀로 즐기는 여정'이라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신탁의 밤>은, 폴 오스터가 제시하는 '사고의 여행' 책자 중 가장 뛰어난 것들 중 하나임에 분명하며, 어쩌면 그의 대표작으로 남을 수도 있을 법한 신비스런 작품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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