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의 매력을 재현하는 리메이크 영화들. 그러나 그 양상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물론 리메이크 영화의 기본은 '원작의 정신'을 살리되, 테크니컬한 면에서나 구성상의 여러 요소들을 보완하여 전편을 '상회'하지만 전편의 심장부를 건드리지는 않는다는 구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등생'적인 리메이크 영화들은 실제로 별다른 매력이 없고, 오히려 다분히 상업적인 '재탕'으로만 보이기 일수이고, 요즘처럼 전세계 영화의 메카인 헐리우드에 정작 '아이디어'가 바닥나 허덕이고 있을 시기에 오래된 고전작품들은 종종 '아직 오리지널을 못 본' 관객들에게 '새 것'처럼 팔아먹을 수 있는 장사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것. 이번에는 이들 리메이크 영화들의 여러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 과연 '우등생'적인 리메이크 방식 외에는 어떤 양상을 발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각각의 리메이크 형식은 모두 오리지널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또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 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원작을 배반한 리메이크
상업적 일면을 제쳐두고 오직 작가주의적 태도만을 반영한다면, 원작의 방향성을 따르지 않는 리메이크 영화야말로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다시 만드는' 유일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계통의 영화들은 대부분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목을 받으며, 또 나름대로 비평적 성과를 거둬내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쇼델로 드 라끌로의 원작을 영화화한 네 편의 작품 - 로제 바딤의 <위험한 관계 1960>과 스티븐 프리어즈의 <위험한 관계>, 밀로스 포먼의 <발몽>, 그리고 이재용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 을 들 수 있다. 바딤은 드 라끌로의 원작을 현대 파리와 알프스 스키 리조트로 옮겨와 1960년대의 모럴-해저드를 담아내고 있고, 프리어즈는 어둡고 침울한 인간탐구를, 포먼은 상류계급에 대해 밝고 경쾌한 풍자와 야유를 보내고 있으며, 이재용은 한국의 조선시대로 무대를 옮겨와 난잡한 양반계급의 도덕적 타락을 진한 멜랑꼴리즘으로 채색하고 있다.
이 밖에 존 부어먼의 하드-보일드 스릴러 <포인트 블랭크>를 새디즘-메저키즘 시네마로 해석한 <페이백>, 중세의 종교/문화/사회적 사고관을 풍자한 원작을 인종갈등 풍자로 옮겨와 풀어낸 <혹성탈출>, 허무주의적 청춘담 <태양은 가득히>를 불안정한 자아 탐구로 변동시킨 <리플리>,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그려낸 B급 호러 원작을 인간 간의 불신과 사회혼탁으로 그려낸 필립 카우프먼의 <바디 스내처>와 이를 다시 군부대로 옮겨 전체주의 풍자를 보여준 아벨 페라라의 <바디 스내처> 등이, 원작의 방향성을 따르지 않는, 혹은 원작의 성격 자체를 변동시킨 작품들의 대표적 예로 꼽힐 수 있다.
이들의 가장 큰 딜레마라면 원작이 '지나치게 유명한' 작품일 경우, 주제나 스타일상에서 큰 변화를 주었을 때 - <샤레이드>에서 특유의 낭만성을 제어하고 거친 스릴러로 변모시킨 조나단 데미의 <찰리의 진실>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철학적 오리지널을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집착과 주변사적 이야기로 꾸며낸 스티븐 소더버그의 <솔라리스> 등 - 반론과 폄하가 '기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고, 이런 까닭에 왠만한 리메이크 영화들은 '그닥 유명하지 않은' 오리지널을 바탕으로 한다는 '공식'을 따르게 되었다.
'소재 발굴' 차원의 리메이크
현재 헐리우드가 '미친 듯이' 몰두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 외 영화의 리메이크 판권 확보이다. 이제 더 이상 '이야기거리'가 나오지 않는 미국영화계에 있어서, 미국인들의 '외국영화에 대한 무관심'은 더없는 호재일 수 밖에 없는데, 프랑스 영화, 스페인 영화, 독일 영화, 일본 영화, 그리고 이제는 한국 영화에 이르기까지 전세계 영화들의 '아이디어'를 사들이고 있는 이들의 노력은, 어찌보면 활짝 피어오르고 이제 소진해버린 거대 왕국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어딘지 서글프다는 느낌도 든다.
처음 헐리우드에서 외국 영화를 리메이크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 '다른 시각'으로 원작을 재단하기 위해서였다. 앙리 조르쥬 끌루조의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공포의 보수>를 윌리엄 프리드킨이 '비쥬얼 스타일리즘'으로 리메이크한 <마법사>(1978)가 이런 케이스이며, 1970년대까지만 해도 '비영어권 영화'가 그닥 대중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시기는 아니었기에 '소재의 발굴' 차원에서 외국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데카당스는 당시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에 속했다.
그러나 이런 '창작성의 마지막 보루'는 1987년, 꼴린느 세로 감독의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1985)를 레너드 니모이 감독이 리메이크한 <뉴욕 세남자와 아기>(1987)가 1억 6000만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헐리우드는 '프랑스 코미디'의 리메이크에 열중하기 시작했으며, <은행강도와 아빠와 나>를 리메이크한 <3인의 도망자>, <산타클로스는 쓰레기>를 리메이크한 <라이프세이버>, <아빠는 나의 영웅>의 리메이크 등이 일거에 쏟아져 나왔다. 프랑스의 드라마틱한 영화들도 다수 리메이크되어 <마틴 기어의 귀향>을 리메이크한 <써머스비>가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한편, 1990년대 중반부터 헐리우드는 유럽 지역의 스릴러 영화 - 헐리우드 스릴러는 <세븐> 이후 소재가 완전히 바닥났다는 것이 중론이다 - 를 리메이크하기 시작했다. 원작을 제작한 네덜란드 감독 조지 슬루이처를 직접 불러와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시킨 <배니싱>(1993)과 역시 덴마크 감독 올레 보르네달을 직접 부른 <나이트워치>(1998), 에릭 스콜바에르그의 원작을 크리스토퍼 놀란이 리메이크한 <인썸니아>(2002)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고, 이 중 <인썸니아>를 제외하자면 비평적/상업적 성공작은 전무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들어서는 나카다 히데오의 원작을 고어 버빈스키가 리메이크한 <링>(2002)이 대성공하자, '일본 호러 영화'의 리메이크 열풍이 서서히 일고 있는 상황이며, 나카다 히데오의 <검은 물 밑에서>와 <카오스>, 원작 감독 시미즈 다카시를 직접 불러 온 <주온>, 구로자와 기요시의 <회로> 등이 제작 중에 있다.
리메이크인가, 아닌가
이 경우는 그 성격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아무리 봐도 리메이크임이 확실한데, 정작 크레딧에는 원작자의 이름이 빠져 있고, 때로는 '사실은 리메이크'라는 점 조차도 부정하고 있는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대표적 예로는, 불명예스럽게도, 끌로드 지디의 <마이 뉴 파트너>(1984)를 리메이크한 것임에 분명한 데도 '참고만 했을 뿐 리메이크는 절대 아니'라고 아직까지도 주장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1993)를 꼽을 수 있다. 더 멀리로 나가자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맨발의 청춘>에서부터 <수렁에서 건진 내 딸>에 이르기까지 태연하게 제작되어 온, 수많은 일본 영화의 '비공식 리메이크'(?) 영화들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둡던 시절의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그만두기로 하고, 이 영화들의 공통점이 '리메이크 판권을 살 돈이 없고, 아이디어를 개발해낼 인력도 없었던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들이라는 사실만 기억해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 외에도, '고의적으로' 크레딧에서 이름을 뺀 리메이크 영화들도 다수 존재한다. 로브 라이너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슈어 씽>(1985)은 분명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의 리메이크임이 분명하고, 토드 헤인즈 감독의 <파 프롬 헤븐> 역시 더글라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1956)의 리메이크임이 분명하지만, 크레딧에는 원작자의 이름이 빠져 있다. 특히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의 경우는 독일의 거장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에 의해 1974년,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을 때에도 원작자의 이름이 빠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 작품들은 원작의 '구조'만을 가져오는 것은 리메이크라 할 수 없으며, 새로운 방향성, 새로운 설정을 첨가하여 전혀 다른 영감을 불어넣어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주장의 표명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언뜻 리메이크라고 분류하기엔 무리가 있음에도 리메이크임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영화들도 존재한다. 대표적 예로는 일본 괴수 영화 전통의 창시자인 1954년작 <고질라>를 리메이크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롤랜드 에머릭 감독의 <고질라>(1998)를 들 수 있다. 오직 '정체불명의 괴수가 도시를 습격한다'는 설정만이 같을 뿐 모든 것이 다른 이 알 수 없는 리메이크작은 원작의 네임밸류를 통해 상업적 인지도를 넓혀 보고자 하는 '홍보 전략'의 일종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으며,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전문 킬러'가 등장한다는 공통점 하나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쟈칼의 날>(1973)을 리메이크했다 주장하고 있는 마이클 케이튼-존스 감독의 <쟈칼>(1997)과 같이 비슷한 '전략'을 펼친 영화들이 최근 들어 늘고 있는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속편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리메이크에 불과한 영화들을 들 수 있다.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2>(1987)는 분명히 속편이 아니라 <이블 데드>(1981)의 리메이크로 밖에 볼 수 없지만 - 두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캠벨 스코트가 각 영화에서 다른 역할로 등장한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찌됐건 영화는 'II'라는 번호를 붙여서 등장했고, 츠카모토 신야의 <철남 2>(1992)나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데스페라도>(1995) 역시 '속편임을 가장한 리메이크'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들 작품들은 대개 전편이 컬트적 반응을 얻어낸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을 보다 '메인스트림'적인 감각으로 다시 만들려 할 때 원작의 '많지 않은' 팬들까지도 흡수할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듯 싶다.
'너무 똑같은' 리메이크
이 경우 역시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그 중 하나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단 한 편 밖에 예를 들 수 없으므로 먼저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바로, 셀룰로이드에 담겨진 가장 어처구니 없는 '실험'이자 무의미한 '도전'이었던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1998)가 그것이다.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흑백에서 컬러로 필름을 바꾸었다는 점을 제외하곤 고의적으로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1960년작 클래식과 '똑같이' 찍고 편집했으며, 그 이유에 대해 반 산트는 '히치코크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 밝힌 바 있다. 결과는 엔터테인먼트로서도 실험영화로서도 모두 어설픈, 기이한 필름덩어리로 결론지어 졌으며, 결국 1990년대의 세계영화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불명예스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또다른 경우는 어처구니 없다기보다 수치스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한 '베끼기' 작품들이다. 가장 근래의 예를 들자면 뤽 베송의 <니키타>(1988)를 거의 완전히 베껴온 존 배덤 감독의 <니나>(1993)의 경우가 있으며, 이들 영화들은 <싸이코>와 같은 '주의/주장'없이, 그저 상상력의 부족과 얄팍한 상업적 계산으로 '도둑질'을 한 경우에 불과하기에 특별히 언급할 만한 가치는 없을 듯 싶다. 물론, 앞서 밝혔듯, 한국영화의 암흑기에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던 일이기에, 우리 입장에선 그닥 할 말이 없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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